사용자 삽입 이미지
Paris Opera National
Siegfried
2013 Opera Bastille

오후 여섯시에 바스티유에 들어가 열 한시를 훌쩍 넘겨 나오는 프로그램은 역시 만만치 않다. '발퀴레'에 비해서 음악이 세지 않고, 스토리면에서도 드라마틱한 요소가 좀 덜하기 때문인지, 공연 시간에는 큰 차이가 없는데 후반으로 갈 수록 굉장히 지치는 느낌이었다. 나중에는 눈과 귀를 열어놓고 정신줄은 놓는 지경에 이르렀다. 세시간 오십오 분. 네시간에 달하는 공연을 내내 집중해서 본 다는건 평소에도 남다른 산만함을 자랑하는 내게 애시당초 미션임파서블이었다. 게다가 앞서 두 번의 공연에서, 중간중간 찾아오는 좋은 대목을 더 맑은 정신으로 즐기기 위해서는 졸리면 졸고, 자막을 읽기 싫으면 무슨 얘긴지 모르고 넘어가는게 낫더라는 결론을 얻었기 때문에, 나는 적당히 졸고, 적당히 지루해하는가 하면, 때로는 눈을 크게 뜨고 때로는 웃어가며 니벨룽의 반지 제 3 장, '지크프리드'를 봤다.

가장 좋았던 것은 무대, 센scène이었다. 1, 2, 3 막이 모두 마음에 들기는 처음이었다. 이번에 느낀 건데, 나는 컬러풀하거나 세부적인 무브먼트가 있는 센을 좋아하는 것 같다. 예를 들면, 1막에서는 무대 위 식물들의 초록과 빨간 소품들의 대비가 마음에 들었는데, 그 색감에서 어딘가 모르게 어린아이가 있는 집의 분위기를 느꼈다. 지크프리드를 데려다 키운 난쟁이 미메의 이야기를 자연스럽게 전달함은 물론, 시각적으로도 아름다운 센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2막에서 대장간의 큰 환기팬이 실제로 돌아가며 무대위에 움직이는 그림자를 만든다거나, 인두에 빨간 불이 들어왔다 꺼진다거나 하는 부분들에도 눈이 갔다. 왜 그런 데 반응하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어린시절부터 인형의 집 주방 놀이의 오븐에 실제로 빨간 불이 들어온다거나 냉장고에 플라스틱 우유곽이 들어있다거나 하는 데 무척 감동하곤 했다.

이번에도 가수들의 노래에는 감탄에 감탄을 거듭했다. 지크프리드 역의 토르스텐 컬 Torsten Kerl은 그 긴 공연 내내 쉬질 않는데도 시종일관 힘차면서도 편안한 - 힘있는 후륜구동 독일명차의 안정적인 승차감을 떠올리게 하는 - 노래를 들려주었다. 게다가 두려움을 모르는 어린 지크프리드를 어찌나 그렇게 천진하게 연기하시는지. 지크프리드가 나무가지를 질질 끌며 무대에 등장하는 순간 그 귀여움에 웃음을 터뜨린 관객은 나 뿐이 아니었다. '발퀴레'에서부터 완벽한 브륀힐데로 눈길을 끌던 알윈 멜러Alwyn Mellor 는 이번에도 비범하고 아름다운 브륀힐데로 분했다. 사실 가수들에게 노래 잘한다는 이야기는 우스울수 있지만, 모든 오페라 가수가 공연장을 나올 때, 노래가 정말 좋았다는 생각에 브로셔를 한번 더 찾아보게 하지는 않는다. 이 날의 가수들은 그런 사람들이었다.

내용을 몰랐던 것은 아니지만, 공연을 다 보고서 불현듯 떠오른 농담이 있었다. "네 남자친구 태어났대. 가봐." '발퀴레' 에서 지크프리드의 부모인 지그문트와 지클린데를 지켜주고 그 벌로 영원의 잠에 빠졌던 브륀힐데는 (우리식으로는 조카 뻘인) 지크프리드의 키스로 긴 잠에서 깨어나 그와 사랑에 빠진다. 돌고 도는 인간사, 이러한 선견지명이 있었기에 신화의 세계는 오늘 날에도 그 가치를 인정받는 것이로구나. 그런 생각을 하며 나는 잰 걸음으로 바스티유를 빠져나왔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2013/04/08 00:15 2013/04/08 00:15

Trackback Address >> 이 글에는 트랙백을 보낼 수 없습니다

댓글을 달아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