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바그너 링 사이클 마지막 장을 보고 왔다. 그 새 시간이 이렇게 되었다. 작년 말 오페라 네 편을 예매하며 느꼈던 막연함은 분명하고 개인적인 감상으로 남았다. 지난 2월부터 한 달에 한 편 꼴로 공연 일정을 따라가는 동안 흥미를 잃기도 하고, 졸기도 하고, 객석에 앉은 채 집에 가고 싶어 한 적도 여러 번이다. 이전에도 썼지만 나는 바그네리안도 아니고, 오페라를 좋아하지만 잘 알지는 못한다. 링 사이클을 선택한 데는 내 허영 섞인 호기심이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고 생각한다. 바그너와 그의 음악을 둘러싼 수많은 담화 속 에서 나는 내가 모르는 그의 음악을 알고 싶었고, 무엇보다도 일단 경험하고 싶었다. 공연을 올리는 입장에서도 부담이 적지 않은 프로그램인 탓에 시기도 맞아줘야 하는데, 내 프랑스 체류와 파리 오페라의 일정이 맞았다. 연이라고 생각했다.
링 사이클을 보고 있노라 이야기하면 대부분의 지인들은 내 호기와 인내심을 칭찬해주었다. 앞서 말했듯 겨우 자리만 지킨 순간도 없지는 않았지만 ‘니벨룽겐의 반지’는 단순히 러닝 타임만으로 청중을 압도하고 버티기만을 요구하는 작품은 아니다. 작품 자체는 오히려, 청중이 원하는 청각적 즐거움을 끊임없이 선사한다. 그것은 때로 여느 오페라에서 듣기 힘든 가수의 힘찬 노래이기도 하고, 어느 순간 귓전에 걸리는 익숙한 모티브이기도 하고, ‘발퀴레의 비행’과 같은 말 그대로 선동적인 선율이기도 하다. 일례로 청중이 원하는 것을 쉽사리 내주지 않는 현대음악의 괴로움 – 물론 그 안에는 다른 즐거움이 깃들어 있지만 - 을 생각하면, 바그너의 음악은 여전히 우리에게 클래식한 의미에서 듣는 기쁨을 선사한다.
무대는 다시 원점으로 돌아간 듯 미니멀했다. ‘라인의 황금’만큼 실망스럽지는 않았지만 전체적으로 보면 파리 오페라의 연출은 크게 만족스럽다 말하기 어렵다. 하지만 앞서 언급한 현대 음악이 그렇듯, 관객이 원하는 것을 부러 주지 않는 것이 현대 예술이 지닌 한가지 성향이라면 그런 의미에서 2013년 파리의 링 사이클은 그 연출 만큼은 매우 현대적이었다고 말할 수 있겠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마지막 신들의 멸망 장면에서 경악을 금치 못했다. 무대에 설치한 스크린위에 FPS(First-person shooter; 1인칭 슈팅 게임) 게임의 한 장면처럼 신들을 총으로 쏘아 쓰러트리는 영상을 띄웠는데, 정말 뜬금없기로 이 지구상에 따라갈 자가 없는 연출이었다. 오페라신에 FPS를 못쓸 이유는 없다. 문제는 스크린에 영사된 영상이 이해할수 없을정도로 조잡해 이전 네시간동안 유지해온 일종의 미니멀한 고급스러움을 다 마신 콜라캔처럼 한방에 찌그러트려버렸다는 것이다. 게다가 객석의 칠할은 중년 이상, 절반은 백발의 노신사,부인들이 채우고 있었는데 그 레인보우식스도 울고 갈 총질 앞에 그분들의 당혹은 이해하고도 남음이다. 진정 파리 오페라가 원하는 것은 아방가르드였던가. 한숨이 나왔다.
여하튼 다섯 달에 걸쳐 네 번을 만나는 동안 음악이 귀에 붙어 따라가기 수월해진 덕에 네시간 십오분의 러닝타임과 한시간 반의 인터미션은 전에없이 물 흐르듯 지나갔다. 그리고 그런 내 반응에 반가움과 기쁨을 느꼈다. 당연하다 못해 진부한 이야기지만, 음악도 영화도 그림도 그리고 음식도, 그 어떤 것이건 일단 경험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그러한 경험의 축적을 통해서 얻을 수 있는 것이 안목이다. 안목이란 단순히 가장 좋은 것, 가장 고급스러운 것을 알아보는 눈이 아니다. 일차적으로 각각의 대상을 마주했을 때 그 대상에 대해 개별적인 견해를 내놓을 수 있는 능력이 바로 안목이다. 보는 눈이 있으면 자연스레 본인의 기준에 따른 줄세우기도 가능할것이다. 안목이 귀한 것은 경험치를 자랑할 수 있기 때문이 아니다. 그런 눈을 통해 비로소 진정한 지각의 즐거움을 누릴 수 있고 더 나아가서는 순수하게 본인을 즐겁게 하는 아카이브를 만들어 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러한 모든 과정의 소실점은 결국 ‘나를 아는 것’이 아닌가, 그런 생각을 한다.
덧붙이기
'라인의 황금'을 보고 난 감상이 실망에 가까운 것이었기 때문인지, 이어지는 '발퀴레'에 대한 설렘은 반감에 반감을 거듭, 급기야 티켓을 끊고 나면 공연 전까지 의식적으로 몇 번은 하는 '귀에 붙이기(전체 감상)'는 커녕 1막만 겨우 찾아 듣고 마는 무성의로 한 달을 보냈다. 좋아하는 밴드의 공연 일정이 잡히면 열심히 떼창 준비를 하며 복습을 하듯, 장르를 불문하고 공연을 만끽하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 준비라는 게 필요하다. 게다가 나는 바그네리안을 자청할 수 있는 수준도 못 되기 때문에 그런 밑준비 없이 가서는 못 따라가고 잠들게 뻔 했는데도 영 의욕이 생기질 않았다.
바그너의 음악극에 대한 정보를 찾다 보면 통상 쉽지 않다, 입문하기 어렵다는 인식을 마주하게 된다. 나도 어느 정도는 동감한다. 일단 오페라 팬이라면 상대적으로 익숙할 이탈리아 오페라의 형식 (레치타티보 + 아리아)을 취하지 않기 때문에 극을 따라가며 자연스레 강 약 중강 약 하는 식으로 조절하게 되는 집중의 리듬 타기가 상대적으로 까다롭다. 게다가 길기는 또 오지게 길어서, '라인의 황금'은 중간 휴식없이 두시간 반을 내리 달리고, '발키리'는 순 공연 시간만 세 시간 사십 오 분이다. 체력 좋은 독일 작곡가 답다.
하지만 그 어렵다는 바그너에 일단 덤비고 보는데는 이유가 있다. 아리아나 레치타티보가 없는 대신, 그의 음악극에는 특정 인물이나 장면을 상징하는 유도동기가 끊임없이 등장하는데, 현대의 영화나 드라마 배경음악에 익숙한 사람이라면 이런 음악적 장치가 아주 낯선 것은 아니다. 기본적으로 특정 선율을 기억하고 있으면 극을 따라가는데 도움이 되고, 특히 '발퀴레'는 많은 영화 감독, 음악 감독들의 사랑을 받은 작품이었던지라 직간접적인 매체 노출이 많았다. 의외로 '들으면 아는' 대목이 많은 작품인 것이다.
때문에 힘들기만 한 작품은 아니었다. 네시간에 달하는 공연 도중에 집중이 흐트러지기도 하고 졸리기도 했지만 나의 무성의함에 비하면 무척 친절한 공연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또, 전편에서 느낀 실망의 가장 큰 원인이었던 연출이 이번에는 상대적으로 괜찮았다는 점도 도움이 되었다. 더 휘황찬란한 눈요기를 제공했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아직 전 작품을 다 본 상태가 아니기 때문에 운을 떼기는 조심스럽지만, 내가 본 링사이클 절반과 다른 작품까지 통틀어 느낀 바, 대부분의 경우 파리 오페라 나시오날의 연출은 분명 일정 수준 이상이지만 '화려하게, 더 화려하게 spectacular! spectacular!'를 지향하는 쪽은 아니다.
조금 다른 이야기이지만, 파리의 오페라 신은 그 이미지에 비해 그리 화려하지도, 사치스럽지도 않다. 유럽 경기 침체가 당장은 문제이겠지만, 그렇지 않을 때에도 언제나 예산 문제가 걸려있기 때문이다. 프랑스는 문화계에 어마어마한 예산을 투입하는 몇 안되는 국가들 가운데 형님 격이고 어느 정도 장사도 잘 하는 편이지만, 사실 그것은 우리가 각종 매체를 통해 자주 조명하는 것 처럼 문화산업과 수익성을 기반으로 한 모델이 아니다. 현대에 지어진 오페라 바스티유의 모토가 오페라의 대중화였듯 파리의 문화 예술계는 '더 많은 돈을 낼 수 있는 사람들을 위한 최상의 혜택'이 아닌 '더 많은 예술애호가들에게 혜택을 줄 수 있는 방향'에 촛점이 맞춰져 있다. 물론 이곳에도 문화 예술을 향유하는 계층과 그들의 경제력 간의 끊을수 없는 연결고리가 존재한다. 허나 앞서 말한 프랑스 예술계의 모토는 더 많은 예술가들과 예술 애호가들을 끌어 안는 원동력임이 틀림없다.
그래서 한풀만 벗겨보면, 프랑스 문화계 종사자들은 언제나 예산 문제로 골치를 앓고 있다. 성공에 성공을 거둔 호퍼의 그랑팔레 전시의 이면에는 예산확보를 위한 대관사업과 작품 대여료 인하를 위한 눈물겨운 네고가 있었다. 매 두 달에 한번 쯤 오페라 나시오날에서는 업커밍 공연들의 할인 혜택을 적은 우편물을 보내온다. 순수한 소비자인 나는 모른다. 나는 언제나 돈을 조금이라도 덜 내기 위해 노력한다. 하지만 내 사치스러운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한 예술소비와 더, 더, 더를 외치는 일은 관둘 때가 되었다. 그것은 내가 사랑한다고 믿는 예술과, 그 예술을 위해 일하는 사람들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ORPHÉE ET EURYDICE
/CHRISTOPH W. GLUCK
*OPÉRA DANSÉ DE PINA BAUSCH
OPÉRA GARNIER
le 12 fev 2012
이번 시즌에 본 공연 중에 가장 아름다운 무대였다. 다시 태어나면 몸을 쓰는 직업을 가지고 싶다는 생각을 종종 하는데, 이 날의 댄서들은 마치 나와 다른 종처럼 보였다. 고도로 다듬어지고 훈련된 인간의 육체는 보석보다 아름답다. 게다가 그 움직임이란!
슬프고 강렬한 1막 첫 장면부터 마지막까지 아름답지 않고 환상적이지 않은 순간이 없었다. 보고 돌아오자마자 다시 보고싶다는 생각이 들어 표를 알아봤는데 남아있을 리 만무했다.
오페라와 춤이 결합된 형태의 공연이었기 때문에 오르페와 에우리디스를 연기하는 댄서와 가수가 각각 이었는데, 에우리디스를 노래하는 가수가 한국인이었다. 오르페에 조금 밀리는 듯 해도 소리가 곱다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아방가르드하면서도 아름답고 내용까지 좋은 무대의 일원으로 서 있는 모습이 근사해 보였다.
이날 객석에는 마치 마레지구의 레스토랑이나 카페 사진에서 그대로 오려 온 듯한 남남 커플들이 많았다. 그들은 분명히 늦잠을 자고 일어나 파트너와 함께 근사한 점심식사를 하고 달콤한 기분으로 가르니에에 도착해 이렇게 아름다운 눈요기를 하고 있는거겠지. 생각하니 부러움이 눈덩이처럼 불어나 급기야는 내 마음속에 눈 사람을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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