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방비도시

from Le Cinéma 2008/01/12 14: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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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방비도시
이상기 감독
김명민 김해숙 손예진

한국 살이의 즐거움 중 하나는 영화관에 가득 한 한국영화들이다.
나는 영화에 관해 그리 까다로운 사람이 아니라, 작가주의 예술영화 뿐 아니라 완성도를 떠나 예쁜 언니 오빠들이 나오는 상업영화들도 아주 좋아하는데 한국이 아닌 곳에서 살다보면 그런 영화들을 접할 기회가 열번에 한번도 안되기 때문이다. 할리우드 영화를 못마땅하게 여기는 건 아니지만, 미국 영화들이 박스오피스 전광판을 꽉꽉 채우고 있는 딴나라 극장들을 드나들다보면 우리나라 극장이 정말 그리워진다. 미국사람 말고, 유럽사람 말고, 한국 사람들의 이야기를 보고 듣고 싶을때. 자국 영화가 선전하고 있는 우리나라의 문화적 토양은 내게는 너무나 사랑스러운 한국의 일면이다.

우리 집 식구들은 떼로 몰려가서 넷이 주르륵 앉아 팝콘과 콜라를 돌려먹으며 영화보기를 무척 즐기는데, 오늘도 그런 날이었다. 크리스마스 이브, 동생이 선택한 좀비영화의 악몽 - 나는 전설이다 -을 뒤로하고 오늘은 동생이 미리 보겠다고 못박아두었던 '마법에 걸린 사랑' 대신 내가 '무방비도시'를 보자고 우겼다. 넷이서 극장에 가면 영화 선택권은 주로 나와 내 동생에게 있는데, 오늘 내가 좀 비실비실 댄 탓인지 동생은 별 반항없이 '마법에 걸린 사랑'을 포기했다.

김빠지는 영화들이 너무 많은 요즘, '무방비도시'는 매끈한 영화는 아니었지만 구성만은 괜찮았다. 무분별한 조폭영화들에 비해 소매치기라는 소재는 새로웠고, 주,조연을 모두 포함해 캐스팅도 적격이었다. 범죄 액션 이라는 영화의 장르에 기대할 만한 것은 모두 충실하게 갖추고 있었다. 덕분에 영화는 어설프지도, 지루하지도 않다.
영화를 보며, 요즘은 조폭도 직업이라는 말이 떠올랐다. 이 영화의 경우는 '조직 범죄단'이라는 표현이 더욱 정확하겠지만. 왜, 사람은 보고 배운대로 먹고 사는 것이 일반적이지 않나. 세상에는 초중고등학교를 차례로 졸업하고 대학을 가거나 일을 잡아 말 그대로 '남들 사는 것 처럼'사는 사람들도 많지만, 그런 사람들이 상상할 수 없는 방법으로 세상을 살아나가야만 하는 사람들도 있다. 영화속에나 나올 이야기라고 웃을 지도 모르지만, 아빠가 조폭이라던가 엄마가 야쿠자의 현지처라던가 하는 '영화같은' 설정은 사실 몇다리만 건너면 얼마든지 주변에서 찾아볼 수 있다. 소매치기 엄마에게서 태어나 소매치기 이모, 아저씨들을 선생삼아 자란 백장미가 프로 쓸이꾼으로 업계 선두를 달리게 되는 인생은 십수년전에 형사아저씨들과 외국에 나간 엄마 없이 형사로 잘 자란 조대영이라는 인물보다 오히려 현실적이다. 이 영화는 인물들의 존재와 이유에 관한 설명에 결코 무성의하지 않다.

이미 배우로서 어느정도 안정된 상태에서 대중의 관심을 받게 된 행운의 사나이 김명민은 주연에 걸맞는 무게와 안정적인 연기력으로 뭔가 사포질이 덜 된듯한 이 영화를 잘 이끌었다. 영화 제작사 쪽에서는 소매치기라는 소재 외에도 '팜므 파탈로 변신한 손예진'을 통해 이 영화만의 매력적인 색채를 만들고자 했던것 같은데, 그도 상대가 김명민이 아니었더라면 어려웠지 않나 싶다. 그만큼 그는 넘치지도, 부족하지도 않게 영화의 중심추 역할을 잘 해주었다.
예쁜 손예진도 섹시하고, 도회적인 매력을 유감없이 발휘해주었다. 연기자체는 평균 이상이었지만 불안정한 대사 톤 탓인지 아직도 물이 올랐다는 느낌은 받을 수 없었다. 하지만 손예진에게 전혀 기대하는 바가 없었던 이전에 비해 지금은 그녀의 차기작이 궁금하다. '배우'가 되려는 열의는 보이지 않더라도 그녀는 관객을 낙심시키지는 않는다고 확신하게 되었다. 적어도 손예진은 아주 예쁘고, 매력도 있고, 재능도 있는 편이니까. (최근에 '싸움'에서의 김태희를 보고 나는 낙심했다.)
이 영화의 퀸은 김해숙 선생님이 아닌가 싶다. 요즘 중견 연기자들의 연기에 감동받는 경우가 종종 있었는데, 오늘도 그랬다. 그녀의 연기를 보고 있으면 연기라는 생각도 못하게 된다. 하도 많은 드라마에 엄마로 나오시는 분이라 초반에는 강만옥이라는 인물에 몰입하기 어려웠지만 그 이후에는 김해숙이라는 이름을 잊어버렸다. 백장미를 볼때는 손예진을 보고 조대영을 보면서는 자꾸 김명민을 떠올렸지만 강만옥은 그냥 강만옥이었다. 바로 이것이 김해숙이라는 배우가 지닌 '흡인력'이다.

영화가 15금 판정에 비해 너무 잔인하다. 총보다는 칼을 쓰는 우리나라의 정서(?)상 그 잔인함은 배가 되어 관객들을 괴롭힌다. 이보다 좀 덜 잔인했어도 액션의 완성도가 떨어지지는 않았을것이라 확신한다. 중고등학생도 못 보게 했으면 싶을 영화를 완전 꼬꼬마들을 데리고 와서 보는 부모들도 있었는데, 내가 부모가 되면, 다른 건 몰라도 영화 등급만큼은 좀 엄격하게 지켜줘야겠다.

2008/01/12 14:58 2008/01/12 14:5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