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과 철학 이야기.

from Le Signet 2008/03/04 17:27


지난 2월 한달 동안은 여태 잘 읽지 않았던 책들만 골라 읽었다.
어느 나라 말이건(;) 읽기가 지독하게 느린 내가 그나마 속도를 내는 소설은 한 권도 읽지 않은 대신,
국내 작가의 기행 산문집 두권과 학교 다닐 때 교양 수업의 교재로 썼던 철학 입문서를 한 권 마쳤다.
탄력을 받아 쭉쭉 읽어나가지 못하면 금방 싫증을 내는만큼
하루에 책 속에 있는 글들을 한 둘정도 꾸준히 읽어나가려고 노력했다.
덕분에 한달동안 읽은 권수는 달랑 세권이었지만 늘 숙제같았던 책들의 끝을 볼 수 있었다 :)


첫번째 권

잃어버린 여행가방  -  박완서 기행 산문집

엄마가 좋다고 하셨던 책 몇권 가운데 하나였다. 덕분에 처음으로 작가 박완서의 글을 읽었다.
책은 좋아한다면서 국내 작가들에게 굉장히 무심했다. 그래도 요즘은 전보다 관심을 두고 있다.  
마침 때가 좋아서 잠시 중국을 여행하는 동안 이 책을 읽기 시작했는데, 작가가 중국 등지를 여행하며
쓴 몇 편의 감상을 그곳에서 읽을 수 있어 즐거웠다.

황산에서 항저우로 가는 시골 산길 - 놀랍게도 고속도로를 완전히 폐쇄한 채 공사 중이었다. - 에서 차가 앞뒤로 꽉꽉 막혀 한참동안 오도가도 못하게 되었을 때, 나와 내 동생은 기다리기를 포기하고 책에 코를 박고 있었다.
그때 내가 읽은 부분은 작가가 요한 바오로 2세의 서거를 추도하기 위해 갔던 바티칸 기행이었는데,
천주교 신자도 아닌 내가 왠지 너무 슬퍼져서 답답한 버스 안에서 훌쩍훌쩍 울었다.

또, 항저우의 호텔에서 피곤에 전채로 축축한 머리를 말리며 상하이 기행 편을 읽고
그 다음날 상하이에 도착해 비좁은 골목길에 박혀 중국인 거리의 눈치를 보며
초라하게 웅크리고 있는 임시정부 청사를 보았을 때는 스산하고 처량한 마음을 어쩔 수 없었다.

박완서의 글은 멋을 부리지도, 과장되지도 않아 솔직하고 담백한 맛이 있었다.
본래 이 책의 모태가 되었던 티베트 여행기 '모독'이 담겨있는 책 뒷부분을 읽으며
자신의 눈으로 본 것에 대한 생각을 부족하지도, 넘치지도 않게 써낸 작가의 진솔함에 무척 흡족했다.

하지만 글을 통해 살짝 상상해본 인간 박완서는 조금 어려운 이모 할머니의 이미지였다.
좋은 작가지만 개인적으로 알게 되면 뭔가 혼이 날것 같은 어른이랄까.
다른 작품들을 읽어보면 그 쌩콩한 이미지가 좀 바뀌지 않을까 생각한다. (하하)



두번째 권

풍경과 상처 - 김훈 기행 산문집

이 책은 학교에서 친하게 지냈던 선배로부터 어느날 선물받았는데,
뭔가 무지하게 한국적이고 어려운 분위기에 좀 겁을 먹고 훑어만 보다가
언젠가는 읽을테다 하고 숙제처럼 책장에 꽂아두었다.

혹자는 김훈을 마초라고 비난하던데, 책을 읽어보니 작가 김훈의 어떤 구석이 마초 소리를 듣는지 알것 같았다.
하지만 그의 글 속에는 아빠의 손바닥 잔금같은 풍경과 무게가 가득 담겨 있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의 아름다움과 서정성을 그린 힘있는 글은 남성적이었으되 매력적이었다.
그리고 생각했다. 남성이 여성에게 끌리듯 여성성이 남성성에 반응하는 것이 다수일텐데
왜 내가 아는 수많은 지적인 여자들은 이렇게 섹시한(...) 작가를 싫어하는 걸까.

아무튼, 이 책은 여러모로 내가 지금까지 즐겨 읽어왔던 책들과는 구성도 분위기도 달랐다.
게다가 최근에 읽은 책들 중에 모르는 표현 단어가 제일 많은 책이었을만큼 쉬운 글도 아니었다.
때문에 매끄럽게 쭉쭉 읽히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그만두고 싶지도 않았다.

나도 언젠가는 김훈 처럼 내 망막에 새겨진 풍경에 내 정신의 색채를 입힌 글을 쓸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래서 내가 나고 자란 광주와 엄마가 그토록 좋아하는 섬진강의 풍경과 건조하고 슬픈 서울의 풍경에 대해
오래오래 이야기 하고 싶다.


세번째 권

철학의 에스프레소 - 빌헬름 바이셰델

역시 철학은 아직도 멀었다.
이 책 읽느라고 2월의 절반은 다 보냈지만,
그중에 뭔가 친해졌다는 느낌이 드는 철학자는 서른 네 명중에 손에 꼽는다.

이 책은 학교 철학 수업의 교재였는데, 사놓고 과연 읽을 수 있을까 스스로 반문했었다.
지난 여름에 '소피의 세계' 합본을 꾸역꾸역 다 읽고 나서
'아무것도 기억하지 않는' 스스로의 멍청함에 깜짝 놀란 이후,
철학 입문서를 적어도 네권은 더 읽어야 뭔가 감이 잡히겠구나 싶은 마음에
다음은 이 책으로 정해두었다. (그냥 새로 살 필요 없이 집에 있으니까.)

여름이 지나 해가 바뀌고 겨울 막바지에 이르러서야 책을 읽기 시작했는데
역시 쉽게 썼다고는 하나 철학 일자무식인 나로서는 고전을 면치 못했다.
하루에 두사람씩 읽자, 그러면 2월 안에는 끝내겠다 하고 수십번도 넘게 목차를 뒤적이며 마음을 다잡기도 했다.

그래도 이 책을 쓴 '빌헬름 바이셰델'이 정말 똑똑하고 훌륭하고 좋은 철학 선생님인 덕분에
무식한 나를 탓할 지언정 책은 절대로 탓할 수가 없었다.
성실히 공부하는 학자 같은 인상을 팍팍 풍기는 번역자도 - 때분에 다른 독자들의 비판도 받는 모양이지만 -
나는 무척 마음에 들어서 책을 따라가는데 적지 않은 도움을 받았다.

'철학의 뒷계단'이라는 책의 원제에 관한 지은이의 설명도 정말 감동의 도가니탕이었다.
흔히 생각하는 '철학'과 '철학자'의 위용에 지레 겁을 먹고는 영원히 알수 없다고만 생각했던 것들에 대해
지은이는, 사실 우리와 똑같은 사람이었던 철학자들의 인간적인 면모와
놀랍되 결코 완전할 수는 없었던 그들의 철학적 고민을 뒷계단을 통해 먼저 살짝 알려주고자 했다.
어쩌면 나처럼 얕은 독자를 위해 이렇게 좋은 책을 써주었을까 싶어 고마울 정도였다.  

뭐 그렇다고 내가 이 책을 몽땅 술술 이해했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적어도 '소피의 세계'를 읽고 놀란 가슴을 좀 진정시킬 수는 있었고, 결정적으로 철학이 좋아졌다는 것.
그래서 앞으로도 다른 철학 입문서들과 쉬운 철학서들을 좀 찾아 읽고 싶어졌다는 사실 만큼은
한 발자국의 진전이었다고 생각한다.




여담,
내가 가끔 책을 사는 삼청동 내서재의 할인 코너와 용산역 플랫폼의 중고서적, 그리고 교보문고에서
2월 말에 꾸준히 책을 사들인데다, 집에서 '사놓고 안 읽는 책꽂이'에서 또 몇권을 옮겨와 꽤 읽을 책이 많아졌다.
3월 한달 동안은 좀 더 많은 책을 읽어야 하고, 또 읽게 될 것 같다.
나풀나풀한 소설도 열심히 읽고 필요한 공부도 열심히 해서 알찬 봄을 채워나가자 :)

 

2008/03/04 17:27 2008/03/04 17: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