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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 12월이 시작될 즈음 과연 연말이란게 오긴 오는 걸까, 침대에 누워 흐리멍덩한 눈으로 생각했었다. 여덟번의 시험과 네개의 레포트와 두 번의 발표가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만 같았다.
자주 하는 말이지만 시험기간에는 책이 미친듯이 잘 읽힌다. 늘 그랬다. 멀리 돌아갈 것도 없이 상대적으로 한가했던 중간고사때도 그동안 질질 끌어왔던 책들을 모두 끝냈다. 내 나름대로의 현실도피 일수도, 스트레스 해소법일수도 있겠지만 아무튼 날개라도 단 것 같다.

12월 21일 까지 계속 되었던 월화수목금금금의 나날 속에서도 나는 끊임없이 딴짓할 시간을 만들어내 책을 봤다. 사실 정신적으로는 월화수목금금금이었으나 육체적으로는 오히려 여유를 부렸다. 공부는 덜했고 잠은 더 잤다. 당연히 스트레스는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그래서 공부할 시간에는 책을 이고 앉아 읽었다. 악순환이었다.

아무튼, 그 결과를 헤아려보니 중간고사때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많았다. 일일이 감상을 쓰자니 너무 많고, 그래도 간만에 많이 읽었는데 그냥 넘기기는 아쉬워서 간단한 코멘트로 정리해보기로 했다.


Key Word : 책으로 스트레스 풀기

1
어느 멋진 순간 / 피터 메일
나는 피터 메일을 좋아한다. 그의 모든 사는 이야기와 아동 서적에서부터 시작된 그의 작가 이력과 그의 소설들을, 그의 유머와 긍정적인 사고방식을 좋아한다. 그가 계속해서 광고 AE로 날리다가 광고계에 관한 에세이나 소설을 썼더래도 나는 그의 글을 좋아했을 가능성이 높다.
나는 본래 메일의 문체를 아주 좋아한다. 게다가 이 작품에는 메일 특유의 유머러스함이 더 밝은 톤으로 녹아있고, 집중하기도 쉽다. 프로방스 요리와 와인 이야기도 흥미롭다. 가장 좋은 것은 이 소설의 남자주인공, 정확히 말하자면 피터 메일의 소설에 등장하는 남자주인공들이다. 이 남자들은 정말 솔직하고 귀엽다. (좀 냉정하게 말하자면, 여자를 밝히고 능글맞다.) 열세살에 버틀러 선장님께 이상형의 깃발을 드린 이래로 딱히 마음에 드는 이가 없었는데, 딱 십년만에 그 바톤을 이어받을 인물을 찾아 가슴이 다 두근거린다. :)

2
런던 스케치 / 도리스 레싱
레싱의 단편집. 나는 런던이라는 도시에 큰 애정이나 동경을 가지고 있지는 않지만 - 그러기엔 그 옆의 파리를 너무나 편애하므로 - 이 책을 선택한 이유가 런던이라는 소재에 있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 처음 읽은 레싱은 무척이나 신선하면서도 짙은 색깔을 가지고 있었다. 단편집이 그렇듯, 구성이나 이야기가 고르지는 않지만 몇 작품은 아주 마음에 들었다. 그 중 '데비와 줄리'가 가장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3
처음 드시는 분 들을 위한 초밥 / 매리언 키스
삼청동 북까페 '내서재'에서 간간히 들어가있는 삽화가 예쁘다는 이유로 충동구매한 이후, '이건 쓰레기야!'라고 외치기도 했고 '차라리 영어로 읽었다면 프라다 때처럼 보람이라도 있었을텐데'하고 후회하기도 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나쁘진 않다.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 나 쇼퍼 홀릭 같은 류를 좋아한다면 재미있게 읽을 수 있다. 여자 주인공들도 흥미로운 편이고 배경이 아일랜드라 색다른 구석이 있다. 피식피식 웃음을 터뜨릴만한 유머도 있고 영어로 읽는다면 더욱 재미있을 농담들이 심심하면 한번씩 등장한다. 다만 번역본의 경우 분량이 상,하권 도합 700페이지 정도 되기 때문에 양은 좀 많은 편이다. 방학 중 킬링타임용으로는 그만.

4
차가운 밤에 / 에쿠니 가오리
가장 최근에 나온 에쿠니 가오리의 신간. 하지만 들어있는 작품들은 꽤 오래된, 그녀의 초기작들이다. 책 제목인 '차가운 밤에'는 이 책의 첫 부분의 이야기들을 묶는 제목으로 모두 초현실적인 분위기를 지니고 있고 두번째 파트인 '따스한 접시'는 음식을 매개로 한 이야기들이다. '홀리가든'과 '언젠가 기억에서 사라진다해도'를 읽으면서 이제는 더 괜찮은 작품이 나오기를 기대하기 어려우려나 싶었는데 다행히 이번 신간은 그 이전에 출판된 작품들보다 훨씬 나은 분위기를 가지고 있어 만족스러웠다.
요즘 문학계에서는 상당한 인기를 끌고 있는 일본 소설들을 '일본 문학 나부랭이'라고 부르며 그 독자들을 '일본 소설이나 읽는'이라고 평가절하하는 사람들이 있는 모양인데, 좀 지나치다는 생각이 든다. 분명 에쿠니 가오리나 바나나, 미야베 미유키를 나쓰메 소세키나 가와바타 야스나리같은 작가들과 한 줄에 세우는 것은 지금으로서는 어려운 일이지만 나는 동시대를 살아가는 사람으로서 그들의 재능과 시대의 산물인 그 작품들을 존중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5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 / 알랭 드 보통
무엇보다도 보통이 20대에 이 작품을 썼다는게 가장 놀랍다.
이 작품은 연애와 철학을 접목시킨 천재적인 저작임과 동시에 현학적이고 조금은 지루하다. 작품 속 인물이나 사건을 통해 메세지를 전달 하는 방식이 아니라, 화자가 직접 나서 연애의 각 단계별 정신적인 흐름에 대한 시시 콜콜한 철학적 사색들을 꼼꼼히 늘어놓는다. 사건을 통해 A와 B를 설명하거나 암시하는 것이 아니라, 직접적으로 'A는 B이다 왜냐하면 ...기 때문이다' 라는 식의 어조가 계속된다. 때문에 무릎을 치게 만들만큼 명쾌한 구절들이 무척 많은 반면 독자가 상상할 수 있는 영역은 매우 적다.  
와우북페스티벌에서 싼값에 구입한 이후 늘 숙제처럼 남아있었던 책이다. 그 숙제를 해결한 것도, 그 이전부터 지니고 있었던 보통에 대한 호기심을 해소한 것도 모두 개운하다.

6
오늘의 행복 레시피 / 로베르 아르보
지난 가을의 와우 북 페스티벌에서 건진 또 하나의 수작. 정말 프랑스다운, 아름다운 책이다. 전형적인 프랑스식 라이프 스타일에 관한 에세이에 더해 갖가지 귀여운 레시피들이 넘쳐난다.
'프랑스 병'이라는 게 있다. (프랑스 사람들 대부분이 앓고 있고, 가끔 프랑스에서 살다온 외국인들한테도 그 증상이 나타나며 나 역시 발병 단계에는 이르지 않았지만 보균자임이 확실한 것 같다.) 세계 어딜 가든 프랑스 식에 대한 자부심을 버리지 못하며 해외여행에서 돌아와 샤를드골에 내리자 마자 '그래도 프랑스가 제일 좋아'를 외치는 병. 이 책의 저자 무슈 아르보는 뉴욕에서 레스토랑을 운영하고 있지만 분명 뼛속까지 프랑스 병이 깊은 사람이다. 그래서 책을 읽는 동안 중간중간 발끈하기도 했지만, 그런 작은 부분 때문에 이 사랑스러운 책을 내팽개칠 수는 없었다. 무엇보다도, 많은 것을 가졌음에도 스스로 만족하는 인생을 꾸리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도움이 될지도 모른다. 뉴욕에서 아르보가 경영하는 '르 가맹(Le Gamin)'에 가보지 못한 것은 정말 안타까운 일이다. 다시 가게 된다면 꼭 들러서 정말 그렇게 편안한 레스토랑을 운영하고 있는지 두 눈으로 확인해볼테다.


Key Word : 여행 :D

7
자신만만 세계여행 홍콩 필살기 / 이가아
홍콩 여행을 준비하며 하나 쯤 사서 보고 싶었던 여행 서적들. 가이드 북을 잘 사는 편은 아니지만 사서 보면 꽤 재미있다. (이전에 샀던 '파리' 가이드북도 너무 재미있어서 파리에서 여름 내 살고 라호셸로 내려가서도 집에서 열심히 들여다 봤었다.) 비행기 안에서 더 꼼꼼하게 읽을 예정이지만 일단 가고 싶은 곳과 먹고 싶은 것(!)의 리스트를 만드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8
매드포 홍콩, 홍콩에 취하다 / 허원정
이 책은 여행 서적이라기 보다는 홍콩 에세이에 가깝다. 여행에 실질적으로 도움이 되는 호텔 팁이나 관광지 정보를 얻기 보다는 홍콩을 좀 더 친근하게 즐기기 위한 목적으로 읽는 것이 적당하다. 저자가 내가 정기적으로 좋아라하며 체크하는 블로거라 반가운 마음에 책이 나오자마자 주문했다. 블로거들이 책을 내는 경우에 인터넷 상의 포스트들 보다 책이 더 못한 경우도 종종 있기 때문에 걱정도 좀 했는데, 다행히 결과물이 만족스러웠다. 요즘 쏟아지는 사진집 뺨치는 기행 에세이들에 비하면 그다지 '예쁜 책'은 아니지만 대신 읽을 거리가 충분하다. 여행에는 이 책도 가져간다.

9
Bon voyage / Masaki
교보문고 외서 코너에서 보고 꽂혀서 사겠다고 잔돈을 모으기 시작했던 책. 돈을 모아야 할 만큼 비쌌던게 아니라, 일본 원서라서 내가 못 읽는 책이기 때문에 사실 이 책을 부러 사는 건 용돈 낭비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책은 정말 예쁘다. 여행지의 평범한 일상들이 이 책의 사진 속에서는 반짝반짝 빛난다.
모델이자 작가, 예쁜 살림꾼이자 사업가인 마사키가 런던, 파리, 베트남, 교토, 아일랜드, 하와이를 딸 유라라와 여행하며 담은 모습들이 아기자기하면서도 멋스럽게 담겨있다. 이 책이 내가 계획하고 있는 앞으로의 여행들에 신선함과 특별함을 불어넣어주었으면 한다.


Key World : Girly Magazines

10
W, Instyle, Allure
이 달 만큼 내가 잡지를 많이 본 달이 없었다. 몇 번의 기차여행 덕에 책도, 잡지도 원없이 읽었다. 더블유를 보며 처음으로 몽블랑 반지가 예쁘다고 생각햇고 인스타일을 읽으며 케이티 홈즈의 스타일에 눈을 떴다. 얼루어의 이번달 표지는 니콜 키드만 버전의 달력 화보로, - 제시카 심슨을 내세운 인스타일보다도 나쁜 - 진정 최악이라 부를만 했으나 키드만의 담담한 인터뷰만은 괜찮은 읽을 거리였다. 김희선의 결혼 화보를 더블유와 인스타일이 서로 독점 공개라고 주장하는 것은 조금 우스웠다. 그러나 각 잡지의 웨딩드레스, 쥬얼리등의 소개 스타일이 전혀 달라 비교할 만 했다.



잡지 제외, 권 수로 총 열 권이다. 이대로 책을 열심히 읽어 간다면 일년에 백권은 거뜬 할것 같은데. 그것도 학기말의 러쉬 속에서 이루어낸 쾌거인 만큼 이 페이스를 유지해 나갈 수 있었으면 좋겠다. 사실 이번 달에 읽은 책 중에 도리스 레싱이나 보통을 제외하면 그다지 진지하거나 심각한 집중력이 필요한 경우는 없었다. 이 포스트의 제목도, 그래서 부끄러운 거다. 하지만 책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는 점은 굉장히 뿌듯하다.
새해에는 얼마나 읽을 수 있을까. 양보자 질이 중요하다지만 적당한 양이 뒷받침 되지 않는다면 그 또한 무의미하다. 일단 많이 읽고 보자. 일년에 백권. 할 수 있을까?

2007/12/29 02:12 2007/12/29 02: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