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여름부터 꾸준히 읽고 있는 미야베 미유키.
'모방범'과 '이유'를 읽고, 이 능력과 매력을 겸비한 작가에게 푹 빠지고 말았는데, 새해 도서관에서 미야베의 단편집 한 권을 발견한 것을 계기로 연거푸 세 권을 빌려 읽고 한 권은 사버렸다.
모방범에 이력이 난 독자라면 특별할 것도 없지만, 그녀의 책은 두껍다. 하지만 아주 술술 읽히기 때문에 나처럼 정말 읽는게 느린 사람도 집중만 한다면 오백 페이지 쯤은 이틀에 걸쳐 모두 읽을 수 있다.
그럼, 정리해보자, 1월 한 달간 내가 즐긴 미야베 월드.


1. 대답은 필요없어
처음 발견해 읽었던 미야베 미유키의 단편 모음집. 단편들이다보니 미야베 특유의 진중함이나, 사회 문제에 관한 시선, 정교한 짜임은 없지만 작가의 분위기는 충분히 알 수 있다. 무엇보다도, '대답은 필요없어', '배신하지 마' 같은 이야기들은 작가가 정말 하고 싶은 이야기가 무엇인지, 범인을 잡는 것 보다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보여준다. 미야베 미유키가 장르소설 문단에서 '사회파 작가'라 불리는 것은, 그녀의 소설 속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이 얽히고 설킨 사건의 실타래를 정교하게 풀어내는 구성, 내지는 연출이 아니라, 그런 사건을 낳은 사회 구조, 현상이기 때문이다.
그 외에 '둘시네아에 어서 오세요'도 독특한 작품으로 기억에 남았다.


2. 누군가
미야베 미유키가 교고쿠 나츠히코*, 오사와 아리마 와 함께 '교고쿠구'라는 집필 사무실을 운영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읽고 스타일은 전혀 다르나 좋아하는 두 작가(미야베와 교고쿠)가 서로 친한 것이 재미있다고 생각했다. 지금까지 내가 읽어왔던 미야베 여사의 책들은 모두 별개의 이야기들이었는데, 이 '누군가'는 그녀가 내놓을 시리즈물의 첫 번째라고 한다. 일단 분위기는 번역본의 표지처럼 샛노란 색 부드럽고 밝은 분위기이다. 먼저 읽은 작품들의 무거운 분위기를 생각하면 너무 말랑말랑한 것이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일상에 큰 걱정이 없고, 편안하고 행복한 생활을 하는 탐정'의 이야기를 쓰고 싶었다는 작가의 말대로 주인공 '스기무라 사부로'는 안정적인 직장에 부유한 아내와 사랑스러운 딸을 키우며 행복하기 살아가는 직장인이다. 장가를 오지게 잘 간 덕에 집안에서는 없는 자식 취급을 당하며 때때로 비꼬는 사람들 때문에 번민하기도 하지만 그는 스스로 행복을 자부하는 인간이다.
'누군가'는 그런 그가 장인의 지시로 한 사고와 그 유족으로 남은 두 자매의 이야기를 따라가는 이야기인데 사실 '범죄 소설'이라는 타이틀을 달만한 엄청난 사건은 여기 등장하지 않는다. 스기무라는 그저 작은 사건에 주목하여 과거에 어떤 일이 있었고, 현재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가를 성실히 밝혀낼 뿐이다.
미야베 미유키의 '힘'을 좋아하는 독자에게는 좀 맹할수도 있는 작품이지만 소소한 이야기를 좋아하는 나는 이 스기무라 집안의 앞날이 꽤 궁금해졌다. 그건 좋아하는 홈드라마의 다음 편을 기대하는 마음과 비슷했다.

* 교고쿠 나츠히코
'우부메의 여름', '망량의 상자', '광골의 꿈'의 작가. 앞의 세 작품들은 모두 세키구치 다츠미와 교고쿠도라는 두 주인공을 내세우고 있는 괴기소설로 고전적이면서도 독특한 요괴물들이다. 여름, 특히 장마철에 잘 어울리는 이야기들.


3. 화차
미야베 미유키 작품의 백미라 할 만한 작품.
워낙 필력이 좋은 양반이라 이를 뛰어넘을 엄청난 이야기도 충분히 쓸 수 있는 작가이지만, 일단 현재 번역된 작품들 가운데 '모방범', '이유', 그리고 이 '화차'는 작가로서 미야베의 성실함과 에너지, 재능을 모두 보여주는 발군의 작품들이다. 국내에서도 인기 있는 작품이기도 하고, 워낙 다작인 작가라 다른 읽을 거리들도 많아서 도서관에서 예약해놓고 차례가 돌아올때까지 기다리고 있었는데 영 지루해서 어느날 그냥 서점에 간 김에 사버렸다.
미야베를 대표적인 '사회파 작가'로 분류시키는데 일조한 작품인 '화차'는 일본 사회의 신용 카드, 신용 대출 문제를 코드로 그 가운데 상처받고 행복해지고 싶어하는 사람들, 그 허울을 투영하고 있다. 꼼꼼한 취재가 바탕이 되어야만이 가능한 개인 파산 문제에 대한 견해도 좋았다. 책 속에서 등장하는 변호사의 이야기에서, 무절제한 소비, 주제파악도 하지 못하는 허영은 비참한 꼴이 되어도 싸다는 사회의 시선이, 단순히 냉정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무책임한 책임 회피일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신용불량 문제는 더 이상 개인에 의한, 개인의 문제가 아니다. '신조 교코'가 불행해진 것이 애초에 그녀의 잘못 때문이었나?
사건은 처음부터 끝까지 심증과 정황증거들로 엮이지만 전혀 헐겁지 않다. 잔인한 사건이나 묘사 하나 없이도 충분히 독자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 수 있는 작가의 솜씨에 늘 그렇듯 탄복했다.


4. 이름없는 독
앞서 2번에서 쓴 '누군가'와 시리즈물로 연결되는 '탐정물'.
'누군가'가 조금 닭살 돋는다 싶을 만큼 말랑말랑했다면 이번에는 좀 더 미야베다운 분위기가 묻어났다.
스기무라 부부의 사이좋은 결혼생활은 여전히 보기좋고 모모코도 영리하게 무럭무럭 자라는 가운데, 불특정 다수를 노린 독극물 살해사건과 아주 무서운 아르바이트생의 등장으로 또 한 번의 사건이 일어난다. 게다가 이번 시리즈는 스기무라 사부로가 본격적으로 탐정 역할을 맡게 되는 듯한 암시로 마무리되어 기대감을 주었다. 세번째 이야기가 번역된다면 주저 않고 읽을 생각이다.
시리즈의 앞권에 이어 두번째권도 번역한 번역가는 미야베 미유키를 꽤나 좋아하는 모양인데, 세번째 이야기가 집필중이고, 앞으로 미야베 미유키의 현대물은 이 시리즈물에 국한될것이라는 이야기가 역자후기에 실려있었다. 세번째 이야기도 대환영이지만, 아무래도 천 몇페이지씩 끼고 앉아 들들들 읽어 댈 수 있는 두텁고 무거운 이야기들이 계속해서 나와주었으면 한다. 필력 좋은 미야베상, 스기무라 시리즈도 계속, 또 다른 이야기도 계속해주시면 안될까요?


한 평론가는 미야베 미유키의 작업을 '발자크적인 작업'이라고 평했다. 그 서평을 읽고 정말 그 평론가는 똑똑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미야베 미유키 = 발자크 라는 등식을 세우려는 것이 아니다. 미야베 미유키를, 발자크가 했던 작업에 빗대어 설명하는 것이 대단히 효과적이기 때문이다.
작품을 통해 다양한 인간 군상을 제시하고 하나의 세계관을 그리고자 했던 발자크와 미야베 미유키가 사회를 보는 눈, 인간을 그리는 시선은 그 방법적인 면에서 무척 비슷하다. 미야베 미유키의 작품들을 모두 모아 하나의 세계를 구성하면 정확히 현대 일본이 가진 모든 사회 문제들, 벌어지고 있는 사건의 집결체를 구성할 수 있다. 그 작품들이 하나의 현대 일본 테마파크랄까. 사실 그 테마파크 속에서 벌어지는 일들은 관광지의 그것처럼 예쁘지도, 아기자기 하지도 않다. 극도의 정신적 공황상태와 물질 만능주의를 바탕으로 벌어지는 부녀자 납치 살해, 부동산 문제, 신용 불량 문제, 의도형 지능범들, 불특정 다수를 노린 범죄, 독극물 등등. 그러나 이러한 사건들을 그리는 가운데 미야베 미유키의 시선은 '사람'에게 고정되어있다. 그녀는 사건과 사람, 그리고 사회를 결코 분리시키지 않는다. 왜, 어떻게 일이 일어났고 전개되는가를 묵묵히 전하며 그 속에 널부러진 인간을 따뜻한 필치로 써내려간다.
그녀의 작품들도 그렇지만, 나는 우리 문단에 - 순수, 대중, 장르 문학을 모두 넘어 - 그렇게 투명하고 담담하게 문제를 파헤치면서도 인간애가 남아있는 작가가 과연 있는가 하는 생각에 서글퍼졌다. 사회에 대한, 인간에 대한 애정이 어려있는 작가가 있었으면 좋겠다. 없다면, 내가 그런 작가가 될수는 없을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2008/02/01 22:23 2008/02/01 22:23

Trackback Address >> 이 글에는 트랙백을 보낼 수 없습니다

댓글을 달아 주세요

[로그인][오픈아이디란?]
오픈아이디로만 댓글을 남길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