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는 일단 졸업했지만,
그리고 이제 더이상 '교양 수업'을 들을 일도 없겠지만,
공부는 계속한다.
세상에서 가장 싸고, 편하고, 만만한 선생님이 있다면 그건 책 일거다.
이번 달, 유익했던 두 권.
1
촘스키, 누가 무엇으로 세상을 지배하는가
-드니 로베르, 베로니카 자라쇼비치의 촘스키 인터뷰.
노엄 촘스키에 대해 관심을 가지기 시작 한 건 그리 오래 된 일이 아니다.
언어학 수업을 들으며 처음 그의 생성문법이론을 접했고
그때만 해도, 참 이 양반, 모르긴 몰라도 머리는 엄청 좋은 것 같은데
어쩌다가 이런 공부에 빠지게 된 걸까 하는 참으로 어처구니 없는 생각을 했을 뿐이다.
그래서 정말 아무 생각 없이 이 책을 주문했을때도
촘스키가 언어학과 인문학을 뛰어넘어, 시대의 아이콘인 이유를 전혀 알지 못했다.
솔직히, 이 책이 촘스키에 관한 책 가운데 가장 쉽게 읽을 수 있는 한 권이 아닌가 싶다.
무엇보다도 촘스키와의 밀도있는 인터뷰를 묶어 냈기 때문에
잡지 기사처럼 그의 생각을 읽을 수 있다는 점이 내게는 무척 편안했다.
게다가 필요한 배경지식도 그리 많지 않고, 잘 모르는 사건에는 주석이 달려있어
시사, 세계 정세, 사건에 대해 일자무식이라도 부담없이 읽을 수 있었다.
개인적으로, 인터뷰의 인터뷰어가 두 프랑스 언론인이라는 점이
이 한 권의 책을 통해 내가 얻을 수 있었던 핵심을 제공하는 역할을 했다.
촘스키를 상대적으로 매우 늦게 받아들인 프랑스에서 온 언론인들이었기에
프랑스와, 그런 프랑스를 바라보는 촘스키의 견해를 곳곳에서 읽을 수 있었다.
그러한 대목대목에서, 나는 은연중에 '미국'의 대안으로 '프랑스'를 바라보고 있었던
나의 견해 역시 상당히 편파적이었다는 사실을 깨닫지 않을 수 없었다.
한때 막연히 미국을 상당히 긍정적인 국가적 모델로 삼았던 적이 있었고
그 시기를 벗어나 그 모델을 프랑스와 몇몇 유럽 국가들로 옮겨 두었다.
그러나 자유와 연대와 관용을 부르짖는 프랑스의 지식사회와 그들이 이끄는 프랑스라는 나라가
얼마나 폐쇄적이고 보수적이고 맹목적인지를 제대로 알 필요가 있었다.
적어도 나나, 나와 비슷한 '프랑스를 안다'고 말하는 이들은 정확하게 파악해두었다가
이 사회가 우리의 견해를 필요로 할 때 적어도 헛소리는 하지 말아야 한다.
프랑스는, 아니 유럽은 많은 참고자료를 안고 있을뿐, 결코 온전한 대안이 되어줄 수 없다.
그리고 이제는 말하기도 진부하지만,
제발 미국과, 대기업 좀 그만 좋아하자.
2
리바이어던
- 홉스 / 김용환
내가 이 책을 읽을 줄은 아무도 몰랐을거다.
나도 몰랐다.
영문학사 시간이었나, 거의 매시간 해당 텍스트를 읽고 쪽글을 내야 했는데
그 텍스트들 가운데 하나가 홉스의 리바이어던이었다.
나는 텍스트를 요만큼도 이해하려고 하지 않았고,
책을 사놓고도 스스로 이 책은 못 읽겠거니 하고 책장에 고이 꽂아두었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흘러 작년 여름에 '사놓고 안 읽은 책 읽기 하트 프로젝트'를 시작하며
이 책도 고민고민 끝에 책장에 꽂아 넣었다.
다짐 같은건 하지 않았다. 그저 마음이 무거웠을 뿐.
그런데 그 책장에서 이 책의 순서가 돌아와 뽑아 들었고,
읽기 시작하니 읽히더라는 것이다.
물론 책 자체가 리바이어던의 완역본이 아니라
-완역본은 절판상태라고 한다. 이 대목에서 우리나라 공부한다는 인간들을 한번 비꼬고 싶어진다. 훗-
홉스 전공 교수가 쓴, 정확히 말해 원문의 일부를 포함해 '리바이어던'에 관해 가르쳐주는 책이었기 때문에
완역본을 구들구들 끼고 읽는 것보다 훨씬 쉬웠던 탓이다.
리바이어던은 성경에 등장하는 거대한 괴물의 이름인데,
이는 국가의 막강한 힘을 상징한다.
개인이 최소한- 예를 들면 목숨이 위험할 시의 정당방어 - 을 제외한 권리를 국가에 일임하고
개인들이 모여 국가를 형성하기에 국가 이상의 권력은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이 리바이어던의 토대이다.
국가에 관한 홉스의 견해는 그 자체로 완벽해서라기 보다는 '사상의 가치'를 보여주었기에 빛났다.
2000년대의 대학민국을 사는 내게 이 책이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바로 그리스도 왕국론이었는데,
그 부분을 읽으며 성경을 부여잡고 부흥을 부르짖는 뭇 기독교인들에게
내가 울며 매달려서라도 좀 읽히고 싶은 심정이었다.
홉스의 견해 자체가 훌륭해서가 아니라,
제발 당신들이 사랑하는 하나님에 대해 수백년전에 살았던 이 사람의 열에 하나 만큼이라도
머리를 써서 생각을 좀 해 보라는 말을 하고 싶어서다.
현재 우리나라의 기독교를 보며 여태까지 가장 답답해했던 것이,
어떤 문제가 발생해 그들의 의견을 들어야 했을때 한결같이 보여온 감정적인 태도와
무조건 '믿으면 바뀐다'라는 식의 결론이었다.
종교를 탓하자는 것이 아니라,
이성 역시 하나님이 주신 것이라면
그 이성을 통해 하나님을 좀 알아보고, 고민해보고, 그분을 진지하게 사유해보라는 얘기다.
진정 사랑하고, 그에게 생의 마지막을 맡길 것이라면서
초등학생의 연애질만도 못한 사랑을 그들의 신에게 바치는 모습이,
그리고 그런 '어린양'들을 이용해 일요일마다 '전국 노래자랑'만도 못한 '주님의 말씀'을 떠들어대는
수많은 목회자들의 시뻘건 얼굴이 답답하게 느껴지는 것은 비단 나 뿐이었을까.
수많은 기독교 신자들이 살아가는 이나라, 이 사회안에서
정녕 우러러 볼 만한 기독교 문화가 꽃피기는 커녕
매일같이 그와 관련된 사회 문제가 일어나고 많은 사람들의 쓴소리를 듣는 것은
이미 '리바이어던'을 넘어섰을지도 모르는 막강한 힘인 '종교'가
그 어떤 심각한 고민도 없이 그 자리에 주저앉아 땅따먹기만 하고 있는 사이에
교인들의 삶에 어떤 방향도 제시해주지 못하게 되어버렸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홉스는 날카롭더라도 정확하고자 했던 그의 사상때문에
왕당파로부터도, 교회로부터도 따돌림과 비판을 당해야만했다던데,
오늘날의 교회가 얼마나 달라졌을지 셈이라도 좀 해봤으면 싶다.
제발, 화부터 내지 말고 좀 들어줬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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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달이 돌아오기 전에 한 달동안 읽을 책 목록을 정하고
목록에 줄을 그어가며 열심히 읽기 시작한지도 벌써 세 달이 되었다.
네 권, 세 권에 불과했던 지난 1, 2월의 기록에 비해 이번 달엔 꼬박 열권을 채워 기분이 좋다.
그래서 이번엔 책 읽기 포스트를 네 꼭지로 나눠 정리해 볼까 한다.
2월에는 단 한권도 읽지 않았던 소설을 이번 달에는 한풀이라도 하듯 읽어댔다.
사실 읽은 책의 권 수가 늘어난것도 주 특기인 소설 읽기로 돌아왔기 때문이다.
스무살이 넘고서 만화책을 대신해 즐겨 읽어온 것이 대중 소설들이다.
그것도 책이라고 읽고 있느냐는 뭇 '문학하는' 사람들의 무시에도 나는 이런 소설들을 사랑한다.
재미있고, 일상에 가깝고, 편안하다.
책으로 스트레스를 푸는 내게 이보다 더 좋은 주전부리가 있겠는가.
1
내일의 기억
-오기와라 히로시
예전부터 엄마가 보고싶어했던 영화의 원작 소설이다.
동네 DVD 가게에도 들어오질 않고, 하나 TV에도 올라오지 않아서 DVD를 구하는 중이었는데
가격이 떨어지지 않아 꿍하니 기다리고 있는 중이었다.
그런데 용산역에 가면 늘 들리는 플랫폼 헌책방에서 이 소설을 발견했다.
엄마드리려고 사긴 했지만 내가 먼저 읽고, 바쁜 엄마는 아직도 못 보셨다.
처음엔 살짝 밋밋하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차분한 소설이었다.
하지만 그 차분함 너머에 자잘한 삶의 무늬가 새겨져 있다.
마치 해질녘 호수의 물결처럼 잔잔하고 애달픈 이야기가.
기억을 잃는다는 건, 조각난 내 자신을 한 조각, 한 조각 씩 잃어버리는 느낌이 아닐까.
알츠하이머라는, 현존하고 있는, 그리고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앓고 있는 병에 의해
한 인간의 자잘한 일상이 사그러져 가는 모습을 덤덤하게 바라보는 기분이었다.
흔히 불치병에 걸린 주인공의 이야기는 독자의 눈물샘을 짜내기 위해 무진장 노력하기 마련인데,
이 소설은 그런 구석 없이 시종일관 차분한 이야기를 이어간다.
하지만 그 차분한 페이스로 가차없이 주인공이 무너져내리는 모습을 지켜봐야만 했다.
몇 번이고 도예교실 선생에게 젓가락 받침대의 소성비를 내는 사에키의 모습에 가슴이 아팠고
더 이상 아내를 알아보지 못하는 채로 해질녘 산길을 걸어 내려가는 부부의 모습이
서글프고도 아름다웠다.
2
타인의 섹스를 비웃지 마라
- 야마자키 나오코라
이 책을 읽게 된 건 순전히 이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에 아오이 유우가 출연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에는 언제 들어올지, 기다리고 있는데 도통 기미가 보이질 않아 그냥 책을 먼저 읽었다.
놀라울만큼 얇고, 글씨도 큰 책이었다.
그래서 이 책의 첫 페이지를 읽는 순간에도 이 소설이 불륜 소설인지, 유우가 무슨 역으로 나오는지
가늠도 못하고 있었다.
굉장히 비범한 작가, 비범한 소설이라는 비평은 좀 과하다 싶고,
그냥 킬링 타임 용으로 제격인, 읽고 난 후에도 불쾌하지 않은 불륜 소설이라고 말하고 싶다.
부분부분 작가의 재치가 돋보이는 글줄들도 있었으나
불친절한 나는 '이 정도 감각도 없이 대중 소설 작가를 할 수는 없지' 라며 심드렁하게 넘어갔다.
'나는 유리에게 최선을 다하고 있다'고 자신하는 열 아홉살 남자아이의 적당히 자기 중심적인 사랑법이
신선했다. 보통 불륜 소설을 싫어하는 쪽이고, 불륜 소설에서 연상을 좋아하는 남자아이들이 지나치게
조숙하고 감상적이고 뭔가 고고한 인상을 주는 것이 늘 불만이었던 나로서는, 한 때에 지나지 않는
어린 남자애의 불장난을 그답게 그린 작가의 경쾌함이 마음에 들었다.
3
맨드라미의 빨강, 버드나무의 초록
- 에쿠니 가오리
내가 이 책을 읽지 않을리 없다.
에쿠니 가오리의 오만가지 쓸데없는 책들을 전부 가지고 있는 나는
이번에도 습관성 반, 호기심 반으로 이 책을 주문했다.
요즘 낼 만한 소설이 없는지 자꾸 옛날 에쿠니상의 단편들을 모아서 책으로 내는데
그러느니 차라리 내가 몇년 전부터 읽고 싶어하는 '장미나무 비파나무 영 몽 나무'나 내줬으면 좋겠다.
아니면 '제비꽃 설탕절임.'
일본어만 제대로 읽을 줄 알았으면 진즉 원서를 샀을 소설들이다.
이 책을 읽은 사람이라면 가장 어이없어 하겠지만,
나는 '재앙의 전말'이 가장 마음에 들었다.
고양이가 옮겨온 벼룩때문에 남자친구와 헤어지게까지 되는 여자의 이야기인데,
베드버그나 각종 알 수 없는 벌레의 공포에 시달려 본 사람이라면 너무 공감 되서 눈을 뗄 수 없는 작품이다.
이 작품을 읽으면서 작가와 작품, 독자(나)의 감정이 완벽하게 일치되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면
다들 웃겠지만.
사실 굉장히 좋았던 '쯔메타이요루니(차가운 밤에)'에 비교하면 좀 아쉬운 느낌이었다.
하지만 에쿠니상의 초기작이라는 점을 생각해보면 왠지 80년대, 90년대의 그녀를 만나는 것 같아
새롭기도 하다. 소설의 완성도 보다도, 당시 덜 세련되고 더 신선한 에쿠니 가오리를 만난다는데
이번 단편집의 의의를 둘 수 있겠다.
한 남자에게 빠지는 건 너무 힘들다며 이 남자 저 남자를 오가는 여자의 이야기를 납득시키고,
게이 커플과 알콜 중독자 여자의 이야기를 상상초월의 방향으로 끌고나감에도
또 납득시키는 에쿠니 가오리의 무심하고도 섬세한 솜씨에 감탄했다.
4
곰의 포석
- 호리에 도시유키
언젠가 이책을 분명히 읽고 싶다고 생각했었는데, 그게 언제, 어디였었는지 가물가물하다.
책에 관한 웹서핑 중이었는지, 삼청동 내서재에서 본 책 날개에서 였는지 도통 기억나질 않는다.
아무튼 이 책을 샀고, 읽었다.
세편의 단편 모두 프랑스가 배경이거나, 프랑스와 관련이 있는 주인공이 등장하기도 하거니와,
작가가 프랑스에서 몇년씩 공부한 불문학자 - 게다가 빠트릭 모디아노의 작품을 번역한 번역가 -라서
작품의 작은 부분 하나하나에도 눈길이 갔다.
책의 제목이기도 한 '곰의 포석'을 읽던 중에 이 제목을 설명하는 라 퐁텐의 우화 부분을 읽고
사실 상상해보면 너무나 처참한 이야기임에도 박장대소 하고 말았다.
곰의 포석(le pavé de l'ours)이라는 말은
불어로 도와주겠답시고 한 일이 해가 되는 것을 말하는 표현인데,
라 퐁텐의 '곰과 원예가'라는 우화에서 유래되었다.
옛날, 외진 숲속에 외롭게 살던 곰이 꽃과 나무만을 돌보며 역시 외롭게 살던 원예가와 친구가 되었다.
곰은 사냥을 하고 늙은 원예가는 정원을 가꾸며 사이좋게 함께 살았는데,
곰은 노인이 낮잠을 자는 동안 파리를 쫓아주는 일도 했다.
어느날 성가신 파리 한마리가 노인의 코에 앉았고, 아무리 발을 휘저어도 쫓을 수가 없었다.
이 충실한 파리쫓이 곰은 파리 쫓기에 열중한 나머지 포석을 하나 집어들어 내던져 파리와 함께
노인의 머리를 박살내 버렸다.
계속해서 라 퐁텐의 우화는 이렇게 마무리 된다
이리하여 추론에는 서툴지만 뛰어난 투수였던 곰은
그자리에서 노인을 즉사시켰다.
무지몽매한 친구만큼 위험한 것은 없다.
현명한 적이 오히려 훨씬 낫다.
멍청한 친구의 위험성을 나타내기 위해 이런 이야기를 생각해낸 라 퐁텐의 상상력이 기가막힐 따름이다.
그리고 그걸 숙어로 만들어 쓰고 있는 프랑스 사람들의 언어관도.
이어 '모래장수가 지나간다'라는 단편도 꽤 분위기가 좋았다.
모래장수가 지나간다(Le marchand de sable est passé)는 불어로 졸리다는 뜻의 숙어인데
솔직히 이것도 한국인의 정서로는 이해하기 쉽지 않지만
이 단편을 보면 왠지 그런 느낌이 들어 졸린다.
아쿠타가와 상 수상작 치고 여태 재미있는 작품을 못봤는데
이 작품은 나의 관심사에 부합해서였기 때문인지 상당히 재미있게 읽었다.
무엇보다도,
우리학교에 이렇게 젊고, 작품 활동을 하는 현직 작가에, 부지런히 번역도 하는 교수님이 계셨더라면
내가 학교를 6년은 다니지 않았을까 싶은 아쉬움이 마구 든다.
지난 2월 한달 동안은 여태 잘 읽지 않았던 책들만 골라 읽었다.
어느 나라 말이건(;) 읽기가 지독하게 느린 내가 그나마 속도를 내는 소설은 한 권도 읽지 않은 대신,
국내 작가의 기행 산문집 두권과 학교 다닐 때 교양 수업의 교재로 썼던 철학 입문서를 한 권 마쳤다.
탄력을 받아 쭉쭉 읽어나가지 못하면 금방 싫증을 내는만큼
하루에 책 속에 있는 글들을 한 둘정도 꾸준히 읽어나가려고 노력했다.
덕분에 한달동안 읽은 권수는 달랑 세권이었지만 늘 숙제같았던 책들의 끝을 볼 수 있었다 :)
첫번째 권
잃어버린 여행가방 - 박완서 기행 산문집
엄마가 좋다고 하셨던 책 몇권 가운데 하나였다. 덕분에 처음으로 작가 박완서의 글을 읽었다.
책은 좋아한다면서 국내 작가들에게 굉장히 무심했다. 그래도 요즘은 전보다 관심을 두고 있다.
마침 때가 좋아서 잠시 중국을 여행하는 동안 이 책을 읽기 시작했는데, 작가가 중국 등지를 여행하며
쓴 몇 편의 감상을 그곳에서 읽을 수 있어 즐거웠다.
황산에서 항저우로 가는 시골 산길 - 놀랍게도 고속도로를 완전히 폐쇄한 채 공사 중이었다. - 에서 차가 앞뒤로 꽉꽉 막혀 한참동안 오도가도 못하게 되었을 때, 나와 내 동생은 기다리기를 포기하고 책에 코를 박고 있었다.
그때 내가 읽은 부분은 작가가 요한 바오로 2세의 서거를 추도하기 위해 갔던 바티칸 기행이었는데,
천주교 신자도 아닌 내가 왠지 너무 슬퍼져서 답답한 버스 안에서 훌쩍훌쩍 울었다.
또, 항저우의 호텔에서 피곤에 전채로 축축한 머리를 말리며 상하이 기행 편을 읽고
그 다음날 상하이에 도착해 비좁은 골목길에 박혀 중국인 거리의 눈치를 보며
초라하게 웅크리고 있는 임시정부 청사를 보았을 때는 스산하고 처량한 마음을 어쩔 수 없었다.
박완서의 글은 멋을 부리지도, 과장되지도 않아 솔직하고 담백한 맛이 있었다.
본래 이 책의 모태가 되었던 티베트 여행기 '모독'이 담겨있는 책 뒷부분을 읽으며
자신의 눈으로 본 것에 대한 생각을 부족하지도, 넘치지도 않게 써낸 작가의 진솔함에 무척 흡족했다.
하지만 글을 통해 살짝 상상해본 인간 박완서는 조금 어려운 이모 할머니의 이미지였다.
좋은 작가지만 개인적으로 알게 되면 뭔가 혼이 날것 같은 어른이랄까.
다른 작품들을 읽어보면 그 쌩콩한 이미지가 좀 바뀌지 않을까 생각한다. (하하)
두번째 권
풍경과 상처 - 김훈 기행 산문집
이 책은 학교에서 친하게 지냈던 선배로부터 어느날 선물받았는데,
뭔가 무지하게 한국적이고 어려운 분위기에 좀 겁을 먹고 훑어만 보다가
언젠가는 읽을테다 하고 숙제처럼 책장에 꽂아두었다.
혹자는 김훈을 마초라고 비난하던데, 책을 읽어보니 작가 김훈의 어떤 구석이 마초 소리를 듣는지 알것 같았다.
하지만 그의 글 속에는 아빠의 손바닥 잔금같은 풍경과 무게가 가득 담겨 있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의 아름다움과 서정성을 그린 힘있는 글은 남성적이었으되 매력적이었다.
그리고 생각했다. 남성이 여성에게 끌리듯 여성성이 남성성에 반응하는 것이 다수일텐데
왜 내가 아는 수많은 지적인 여자들은 이렇게 섹시한(...) 작가를 싫어하는 걸까.
아무튼, 이 책은 여러모로 내가 지금까지 즐겨 읽어왔던 책들과는 구성도 분위기도 달랐다.
게다가 최근에 읽은 책들 중에 모르는 표현 단어가 제일 많은 책이었을만큼 쉬운 글도 아니었다.
때문에 매끄럽게 쭉쭉 읽히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그만두고 싶지도 않았다.
나도 언젠가는 김훈 처럼 내 망막에 새겨진 풍경에 내 정신의 색채를 입힌 글을 쓸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래서 내가 나고 자란 광주와 엄마가 그토록 좋아하는 섬진강의 풍경과 건조하고 슬픈 서울의 풍경에 대해
오래오래 이야기 하고 싶다.
세번째 권
철학의 에스프레소 - 빌헬름 바이셰델
역시 철학은 아직도 멀었다.
이 책 읽느라고 2월의 절반은 다 보냈지만,
그중에 뭔가 친해졌다는 느낌이 드는 철학자는 서른 네 명중에 손에 꼽는다.
이 책은 학교 철학 수업의 교재였는데, 사놓고 과연 읽을 수 있을까 스스로 반문했었다.
지난 여름에 '소피의 세계' 합본을 꾸역꾸역 다 읽고 나서
'아무것도 기억하지 않는' 스스로의 멍청함에 깜짝 놀란 이후,
철학 입문서를 적어도 네권은 더 읽어야 뭔가 감이 잡히겠구나 싶은 마음에
다음은 이 책으로 정해두었다. (그냥 새로 살 필요 없이 집에 있으니까.)
여름이 지나 해가 바뀌고 겨울 막바지에 이르러서야 책을 읽기 시작했는데
역시 쉽게 썼다고는 하나 철학 일자무식인 나로서는 고전을 면치 못했다.
하루에 두사람씩 읽자, 그러면 2월 안에는 끝내겠다 하고 수십번도 넘게 목차를 뒤적이며 마음을 다잡기도 했다.
그래도 이 책을 쓴 '빌헬름 바이셰델'이 정말 똑똑하고 훌륭하고 좋은 철학 선생님인 덕분에
무식한 나를 탓할 지언정 책은 절대로 탓할 수가 없었다.
성실히 공부하는 학자 같은 인상을 팍팍 풍기는 번역자도 - 때분에 다른 독자들의 비판도 받는 모양이지만 -
나는 무척 마음에 들어서 책을 따라가는데 적지 않은 도움을 받았다.
'철학의 뒷계단'이라는 책의 원제에 관한 지은이의 설명도 정말 감동의 도가니탕이었다.
흔히 생각하는 '철학'과 '철학자'의 위용에 지레 겁을 먹고는 영원히 알수 없다고만 생각했던 것들에 대해
지은이는, 사실 우리와 똑같은 사람이었던 철학자들의 인간적인 면모와
놀랍되 결코 완전할 수는 없었던 그들의 철학적 고민을 뒷계단을 통해 먼저 살짝 알려주고자 했다.
어쩌면 나처럼 얕은 독자를 위해 이렇게 좋은 책을 써주었을까 싶어 고마울 정도였다.
뭐 그렇다고 내가 이 책을 몽땅 술술 이해했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적어도 '소피의 세계'를 읽고 놀란 가슴을 좀 진정시킬 수는 있었고, 결정적으로 철학이 좋아졌다는 것.
그래서 앞으로도 다른 철학 입문서들과 쉬운 철학서들을 좀 찾아 읽고 싶어졌다는 사실 만큼은
한 발자국의 진전이었다고 생각한다.
여담,
내가 가끔 책을 사는 삼청동 내서재의 할인 코너와 용산역 플랫폼의 중고서적, 그리고 교보문고에서
2월 말에 꾸준히 책을 사들인데다, 집에서 '사놓고 안 읽는 책꽂이'에서 또 몇권을 옮겨와 꽤 읽을 책이 많아졌다.
3월 한달 동안은 좀 더 많은 책을 읽어야 하고, 또 읽게 될 것 같다.
나풀나풀한 소설도 열심히 읽고 필요한 공부도 열심히 해서 알찬 봄을 채워나가자 :)
작년 여름부터 꾸준히 읽고 있는 미야베 미유키.
'모방범'과 '이유'를 읽고, 이 능력과 매력을 겸비한 작가에게 푹 빠지고 말았는데, 새해 도서관에서 미야베의 단편집 한 권을 발견한 것을 계기로 연거푸 세 권을 빌려 읽고 한 권은 사버렸다.
모방범에 이력이 난 독자라면 특별할 것도 없지만, 그녀의 책은 두껍다. 하지만 아주 술술 읽히기 때문에 나처럼 정말 읽는게 느린 사람도 집중만 한다면 오백 페이지 쯤은 이틀에 걸쳐 모두 읽을 수 있다.
그럼, 정리해보자, 1월 한 달간 내가 즐긴 미야베 월드.
1. 대답은 필요없어
처음 발견해 읽었던 미야베 미유키의 단편 모음집. 단편들이다보니 미야베 특유의 진중함이나, 사회 문제에 관한 시선, 정교한 짜임은 없지만 작가의 분위기는 충분히 알 수 있다. 무엇보다도, '대답은 필요없어', '배신하지 마' 같은 이야기들은 작가가 정말 하고 싶은 이야기가 무엇인지, 범인을 잡는 것 보다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보여준다. 미야베 미유키가 장르소설 문단에서 '사회파 작가'라 불리는 것은, 그녀의 소설 속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이 얽히고 설킨 사건의 실타래를 정교하게 풀어내는 구성, 내지는 연출이 아니라, 그런 사건을 낳은 사회 구조, 현상이기 때문이다.
그 외에 '둘시네아에 어서 오세요'도 독특한 작품으로 기억에 남았다.
2. 누군가
미야베 미유키가 교고쿠 나츠히코*, 오사와 아리마 와 함께 '교고쿠구'라는 집필 사무실을 운영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읽고 스타일은 전혀 다르나 좋아하는 두 작가(미야베와 교고쿠)가 서로 친한 것이 재미있다고 생각했다. 지금까지 내가 읽어왔던 미야베 여사의 책들은 모두 별개의 이야기들이었는데, 이 '누군가'는 그녀가 내놓을 시리즈물의 첫 번째라고 한다. 일단 분위기는 번역본의 표지처럼 샛노란 색 부드럽고 밝은 분위기이다. 먼저 읽은 작품들의 무거운 분위기를 생각하면 너무 말랑말랑한 것이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일상에 큰 걱정이 없고, 편안하고 행복한 생활을 하는 탐정'의 이야기를 쓰고 싶었다는 작가의 말대로 주인공 '스기무라 사부로'는 안정적인 직장에 부유한 아내와 사랑스러운 딸을 키우며 행복하기 살아가는 직장인이다. 장가를 오지게 잘 간 덕에 집안에서는 없는 자식 취급을 당하며 때때로 비꼬는 사람들 때문에 번민하기도 하지만 그는 스스로 행복을 자부하는 인간이다.
'누군가'는 그런 그가 장인의 지시로 한 사고와 그 유족으로 남은 두 자매의 이야기를 따라가는 이야기인데 사실 '범죄 소설'이라는 타이틀을 달만한 엄청난 사건은 여기 등장하지 않는다. 스기무라는 그저 작은 사건에 주목하여 과거에 어떤 일이 있었고, 현재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가를 성실히 밝혀낼 뿐이다.
미야베 미유키의 '힘'을 좋아하는 독자에게는 좀 맹할수도 있는 작품이지만 소소한 이야기를 좋아하는 나는 이 스기무라 집안의 앞날이 꽤 궁금해졌다. 그건 좋아하는 홈드라마의 다음 편을 기대하는 마음과 비슷했다.
* 교고쿠 나츠히코
'우부메의 여름', '망량의 상자', '광골의 꿈'의 작가. 앞의 세 작품들은 모두 세키구치 다츠미와 교고쿠도라는 두 주인공을 내세우고 있는 괴기소설로 고전적이면서도 독특한 요괴물들이다. 여름, 특히 장마철에 잘 어울리는 이야기들.
3. 화차
미야베 미유키 작품의 백미라 할 만한 작품.
워낙 필력이 좋은 양반이라 이를 뛰어넘을 엄청난 이야기도 충분히 쓸 수 있는 작가이지만, 일단 현재 번역된 작품들 가운데 '모방범', '이유', 그리고 이 '화차'는 작가로서 미야베의 성실함과 에너지, 재능을 모두 보여주는 발군의 작품들이다. 국내에서도 인기 있는 작품이기도 하고, 워낙 다작인 작가라 다른 읽을 거리들도 많아서 도서관에서 예약해놓고 차례가 돌아올때까지 기다리고 있었는데 영 지루해서 어느날 그냥 서점에 간 김에 사버렸다.
미야베를 대표적인 '사회파 작가'로 분류시키는데 일조한 작품인 '화차'는 일본 사회의 신용 카드, 신용 대출 문제를 코드로 그 가운데 상처받고 행복해지고 싶어하는 사람들, 그 허울을 투영하고 있다. 꼼꼼한 취재가 바탕이 되어야만이 가능한 개인 파산 문제에 대한 견해도 좋았다. 책 속에서 등장하는 변호사의 이야기에서, 무절제한 소비, 주제파악도 하지 못하는 허영은 비참한 꼴이 되어도 싸다는 사회의 시선이, 단순히 냉정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무책임한 책임 회피일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신용불량 문제는 더 이상 개인에 의한, 개인의 문제가 아니다. '신조 교코'가 불행해진 것이 애초에 그녀의 잘못 때문이었나?
사건은 처음부터 끝까지 심증과 정황증거들로 엮이지만 전혀 헐겁지 않다. 잔인한 사건이나 묘사 하나 없이도 충분히 독자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 수 있는 작가의 솜씨에 늘 그렇듯 탄복했다.
4. 이름없는 독
앞서 2번에서 쓴 '누군가'와 시리즈물로 연결되는 '탐정물'.
'누군가'가 조금 닭살 돋는다 싶을 만큼 말랑말랑했다면 이번에는 좀 더 미야베다운 분위기가 묻어났다.
스기무라 부부의 사이좋은 결혼생활은 여전히 보기좋고 모모코도 영리하게 무럭무럭 자라는 가운데, 불특정 다수를 노린 독극물 살해사건과 아주 무서운 아르바이트생의 등장으로 또 한 번의 사건이 일어난다. 게다가 이번 시리즈는 스기무라 사부로가 본격적으로 탐정 역할을 맡게 되는 듯한 암시로 마무리되어 기대감을 주었다. 세번째 이야기가 번역된다면 주저 않고 읽을 생각이다.
시리즈의 앞권에 이어 두번째권도 번역한 번역가는 미야베 미유키를 꽤나 좋아하는 모양인데, 세번째 이야기가 집필중이고, 앞으로 미야베 미유키의 현대물은 이 시리즈물에 국한될것이라는 이야기가 역자후기에 실려있었다. 세번째 이야기도 대환영이지만, 아무래도 천 몇페이지씩 끼고 앉아 들들들 읽어 댈 수 있는 두텁고 무거운 이야기들이 계속해서 나와주었으면 한다. 필력 좋은 미야베상, 스기무라 시리즈도 계속, 또 다른 이야기도 계속해주시면 안될까요?
한 평론가는 미야베 미유키의 작업을 '발자크적인 작업'이라고 평했다. 그 서평을 읽고 정말 그 평론가는 똑똑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미야베 미유키 = 발자크 라는 등식을 세우려는 것이 아니다. 미야베 미유키를, 발자크가 했던 작업에 빗대어 설명하는 것이 대단히 효과적이기 때문이다.
작품을 통해 다양한 인간 군상을 제시하고 하나의 세계관을 그리고자 했던 발자크와 미야베 미유키가 사회를 보는 눈, 인간을 그리는 시선은 그 방법적인 면에서 무척 비슷하다. 미야베 미유키의 작품들을 모두 모아 하나의 세계를 구성하면 정확히 현대 일본이 가진 모든 사회 문제들, 벌어지고 있는 사건의 집결체를 구성할 수 있다. 그 작품들이 하나의 현대 일본 테마파크랄까. 사실 그 테마파크 속에서 벌어지는 일들은 관광지의 그것처럼 예쁘지도, 아기자기 하지도 않다. 극도의 정신적 공황상태와 물질 만능주의를 바탕으로 벌어지는 부녀자 납치 살해, 부동산 문제, 신용 불량 문제, 의도형 지능범들, 불특정 다수를 노린 범죄, 독극물 등등. 그러나 이러한 사건들을 그리는 가운데 미야베 미유키의 시선은 '사람'에게 고정되어있다. 그녀는 사건과 사람, 그리고 사회를 결코 분리시키지 않는다. 왜, 어떻게 일이 일어났고 전개되는가를 묵묵히 전하며 그 속에 널부러진 인간을 따뜻한 필치로 써내려간다.
그녀의 작품들도 그렇지만, 나는 우리 문단에 - 순수, 대중, 장르 문학을 모두 넘어 - 그렇게 투명하고 담담하게 문제를 파헤치면서도 인간애가 남아있는 작가가 과연 있는가 하는 생각에 서글퍼졌다. 사회에 대한, 인간에 대한 애정이 어려있는 작가가 있었으면 좋겠다. 없다면, 내가 그런 작가가 될수는 없을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늦게 알게 된 바람에 홍콩에서 못 구해온 걸 한스럽게 여겼던,
그래서 뒤늦게 샹하이 공항 구석구석에 박혀있는 서점 외서가를 전부 뒤졌으나 구하지 못했던,
(그리고 대신 빌 버포드의 'Heat'을 충동구매했다.)
Cooking for Mr. Latte
온/오프라인 서점 수십군데를 들쑤셔
반디 앤 루니스 강남 사무실에 박혀있었던 딱 한권을 찾아냈다.
책 한권 찾겠다고 온 종로와 강남을 다 쑤시고 다녔으니.
이 기세면 앞으로는 못 받은 돈도 대신 받아 줄 수 있을 것 같다.
아이 좋아 ♡
막 12월이 시작될 즈음 과연 연말이란게 오긴 오는 걸까, 침대에 누워 흐리멍덩한 눈으로 생각했었다. 여덟번의 시험과 네개의 레포트와 두 번의 발표가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만 같았다.
자주 하는 말이지만 시험기간에는 책이 미친듯이 잘 읽힌다. 늘 그랬다. 멀리 돌아갈 것도 없이 상대적으로 한가했던 중간고사때도 그동안 질질 끌어왔던 책들을 모두 끝냈다. 내 나름대로의 현실도피 일수도, 스트레스 해소법일수도 있겠지만 아무튼 날개라도 단 것 같다.
12월 21일 까지 계속 되었던 월화수목금금금의 나날 속에서도 나는 끊임없이 딴짓할 시간을 만들어내 책을 봤다. 사실 정신적으로는 월화수목금금금이었으나 육체적으로는 오히려 여유를 부렸다. 공부는 덜했고 잠은 더 잤다. 당연히 스트레스는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그래서 공부할 시간에는 책을 이고 앉아 읽었다. 악순환이었다.
아무튼, 그 결과를 헤아려보니 중간고사때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많았다. 일일이 감상을 쓰자니 너무 많고, 그래도 간만에 많이 읽었는데 그냥 넘기기는 아쉬워서 간단한 코멘트로 정리해보기로 했다.
Key Word : 책으로 스트레스 풀기
1
어느 멋진 순간 / 피터 메일
나는 피터 메일을 좋아한다. 그의 모든 사는 이야기와 아동 서적에서부터 시작된 그의 작가 이력과 그의 소설들을, 그의 유머와 긍정적인 사고방식을 좋아한다. 그가 계속해서 광고 AE로 날리다가 광고계에 관한 에세이나 소설을 썼더래도 나는 그의 글을 좋아했을 가능성이 높다.
나는 본래 메일의 문체를 아주 좋아한다. 게다가 이 작품에는 메일 특유의 유머러스함이 더 밝은 톤으로 녹아있고, 집중하기도 쉽다. 프로방스 요리와 와인 이야기도 흥미롭다. 가장 좋은 것은 이 소설의 남자주인공, 정확히 말하자면 피터 메일의 소설에 등장하는 남자주인공들이다. 이 남자들은 정말 솔직하고 귀엽다. (좀 냉정하게 말하자면, 여자를 밝히고 능글맞다.) 열세살에 버틀러 선장님께 이상형의 깃발을 드린 이래로 딱히 마음에 드는 이가 없었는데, 딱 십년만에 그 바톤을 이어받을 인물을 찾아 가슴이 다 두근거린다. :)
2
런던 스케치 / 도리스 레싱
레싱의 단편집. 나는 런던이라는 도시에 큰 애정이나 동경을 가지고 있지는 않지만 - 그러기엔 그 옆의 파리를 너무나 편애하므로 - 이 책을 선택한 이유가 런던이라는 소재에 있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 처음 읽은 레싱은 무척이나 신선하면서도 짙은 색깔을 가지고 있었다. 단편집이 그렇듯, 구성이나 이야기가 고르지는 않지만 몇 작품은 아주 마음에 들었다. 그 중 '데비와 줄리'가 가장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3
처음 드시는 분 들을 위한 초밥 / 매리언 키스
삼청동 북까페 '내서재'에서 간간히 들어가있는 삽화가 예쁘다는 이유로 충동구매한 이후, '이건 쓰레기야!'라고 외치기도 했고 '차라리 영어로 읽었다면 프라다 때처럼 보람이라도 있었을텐데'하고 후회하기도 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나쁘진 않다.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 나 쇼퍼 홀릭 같은 류를 좋아한다면 재미있게 읽을 수 있다. 여자 주인공들도 흥미로운 편이고 배경이 아일랜드라 색다른 구석이 있다. 피식피식 웃음을 터뜨릴만한 유머도 있고 영어로 읽는다면 더욱 재미있을 농담들이 심심하면 한번씩 등장한다. 다만 번역본의 경우 분량이 상,하권 도합 700페이지 정도 되기 때문에 양은 좀 많은 편이다. 방학 중 킬링타임용으로는 그만.
4
차가운 밤에 / 에쿠니 가오리
가장 최근에 나온 에쿠니 가오리의 신간. 하지만 들어있는 작품들은 꽤 오래된, 그녀의 초기작들이다. 책 제목인 '차가운 밤에'는 이 책의 첫 부분의 이야기들을 묶는 제목으로 모두 초현실적인 분위기를 지니고 있고 두번째 파트인 '따스한 접시'는 음식을 매개로 한 이야기들이다. '홀리가든'과 '언젠가 기억에서 사라진다해도'를 읽으면서 이제는 더 괜찮은 작품이 나오기를 기대하기 어려우려나 싶었는데 다행히 이번 신간은 그 이전에 출판된 작품들보다 훨씬 나은 분위기를 가지고 있어 만족스러웠다.
요즘 문학계에서는 상당한 인기를 끌고 있는 일본 소설들을 '일본 문학 나부랭이'라고 부르며 그 독자들을 '일본 소설이나 읽는'이라고 평가절하하는 사람들이 있는 모양인데, 좀 지나치다는 생각이 든다. 분명 에쿠니 가오리나 바나나, 미야베 미유키를 나쓰메 소세키나 가와바타 야스나리같은 작가들과 한 줄에 세우는 것은 지금으로서는 어려운 일이지만 나는 동시대를 살아가는 사람으로서 그들의 재능과 시대의 산물인 그 작품들을 존중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5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 / 알랭 드 보통
무엇보다도 보통이 20대에 이 작품을 썼다는게 가장 놀랍다.
이 작품은 연애와 철학을 접목시킨 천재적인 저작임과 동시에 현학적이고 조금은 지루하다. 작품 속 인물이나 사건을 통해 메세지를 전달 하는 방식이 아니라, 화자가 직접 나서 연애의 각 단계별 정신적인 흐름에 대한 시시 콜콜한 철학적 사색들을 꼼꼼히 늘어놓는다. 사건을 통해 A와 B를 설명하거나 암시하는 것이 아니라, 직접적으로 'A는 B이다 왜냐하면 ...기 때문이다' 라는 식의 어조가 계속된다. 때문에 무릎을 치게 만들만큼 명쾌한 구절들이 무척 많은 반면 독자가 상상할 수 있는 영역은 매우 적다.
와우북페스티벌에서 싼값에 구입한 이후 늘 숙제처럼 남아있었던 책이다. 그 숙제를 해결한 것도, 그 이전부터 지니고 있었던 보통에 대한 호기심을 해소한 것도 모두 개운하다.
6
오늘의 행복 레시피 / 로베르 아르보
지난 가을의 와우 북 페스티벌에서 건진 또 하나의 수작. 정말 프랑스다운, 아름다운 책이다. 전형적인 프랑스식 라이프 스타일에 관한 에세이에 더해 갖가지 귀여운 레시피들이 넘쳐난다.
'프랑스 병'이라는 게 있다. (프랑스 사람들 대부분이 앓고 있고, 가끔 프랑스에서 살다온 외국인들한테도 그 증상이 나타나며 나 역시 발병 단계에는 이르지 않았지만 보균자임이 확실한 것 같다.) 세계 어딜 가든 프랑스 식에 대한 자부심을 버리지 못하며 해외여행에서 돌아와 샤를드골에 내리자 마자 '그래도 프랑스가 제일 좋아'를 외치는 병. 이 책의 저자 무슈 아르보는 뉴욕에서 레스토랑을 운영하고 있지만 분명 뼛속까지 프랑스 병이 깊은 사람이다. 그래서 책을 읽는 동안 중간중간 발끈하기도 했지만, 그런 작은 부분 때문에 이 사랑스러운 책을 내팽개칠 수는 없었다. 무엇보다도, 많은 것을 가졌음에도 스스로 만족하는 인생을 꾸리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도움이 될지도 모른다. 뉴욕에서 아르보가 경영하는 '르 가맹(Le Gamin)'에 가보지 못한 것은 정말 안타까운 일이다. 다시 가게 된다면 꼭 들러서 정말 그렇게 편안한 레스토랑을 운영하고 있는지 두 눈으로 확인해볼테다.
Key Word : 여행 :D
7
자신만만 세계여행 홍콩 필살기 / 이가아
홍콩 여행을 준비하며 하나 쯤 사서 보고 싶었던 여행 서적들. 가이드 북을 잘 사는 편은 아니지만 사서 보면 꽤 재미있다. (이전에 샀던 '파리' 가이드북도 너무 재미있어서 파리에서 여름 내 살고 라호셸로 내려가서도 집에서 열심히 들여다 봤었다.) 비행기 안에서 더 꼼꼼하게 읽을 예정이지만 일단 가고 싶은 곳과 먹고 싶은 것(!)의 리스트를 만드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8
매드포 홍콩, 홍콩에 취하다 / 허원정
이 책은 여행 서적이라기 보다는 홍콩 에세이에 가깝다. 여행에 실질적으로 도움이 되는 호텔 팁이나 관광지 정보를 얻기 보다는 홍콩을 좀 더 친근하게 즐기기 위한 목적으로 읽는 것이 적당하다. 저자가 내가 정기적으로 좋아라하며 체크하는 블로거라 반가운 마음에 책이 나오자마자 주문했다. 블로거들이 책을 내는 경우에 인터넷 상의 포스트들 보다 책이 더 못한 경우도 종종 있기 때문에 걱정도 좀 했는데, 다행히 결과물이 만족스러웠다. 요즘 쏟아지는 사진집 뺨치는 기행 에세이들에 비하면 그다지 '예쁜 책'은 아니지만 대신 읽을 거리가 충분하다. 여행에는 이 책도 가져간다.
9
Bon voyage / Masaki
교보문고 외서 코너에서 보고 꽂혀서 사겠다고 잔돈을 모으기 시작했던 책. 돈을 모아야 할 만큼 비쌌던게 아니라, 일본 원서라서 내가 못 읽는 책이기 때문에 사실 이 책을 부러 사는 건 용돈 낭비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책은 정말 예쁘다. 여행지의 평범한 일상들이 이 책의 사진 속에서는 반짝반짝 빛난다.
모델이자 작가, 예쁜 살림꾼이자 사업가인 마사키가 런던, 파리, 베트남, 교토, 아일랜드, 하와이를 딸 유라라와 여행하며 담은 모습들이 아기자기하면서도 멋스럽게 담겨있다. 이 책이 내가 계획하고 있는 앞으로의 여행들에 신선함과 특별함을 불어넣어주었으면 한다.
Key World : Girly Magazines
10
W, Instyle, Allure
이 달 만큼 내가 잡지를 많이 본 달이 없었다. 몇 번의 기차여행 덕에 책도, 잡지도 원없이 읽었다. 더블유를 보며 처음으로 몽블랑 반지가 예쁘다고 생각햇고 인스타일을 읽으며 케이티 홈즈의 스타일에 눈을 떴다. 얼루어의 이번달 표지는 니콜 키드만 버전의 달력 화보로, - 제시카 심슨을 내세운 인스타일보다도 나쁜 - 진정 최악이라 부를만 했으나 키드만의 담담한 인터뷰만은 괜찮은 읽을 거리였다. 김희선의 결혼 화보를 더블유와 인스타일이 서로 독점 공개라고 주장하는 것은 조금 우스웠다. 그러나 각 잡지의 웨딩드레스, 쥬얼리등의 소개 스타일이 전혀 달라 비교할 만 했다.
잡지 제외, 권 수로 총 열 권이다. 이대로 책을 열심히 읽어 간다면 일년에 백권은 거뜬 할것 같은데. 그것도 학기말의 러쉬 속에서 이루어낸 쾌거인 만큼 이 페이스를 유지해 나갈 수 있었으면 좋겠다. 사실 이번 달에 읽은 책 중에 도리스 레싱이나 보통을 제외하면 그다지 진지하거나 심각한 집중력이 필요한 경우는 없었다. 이 포스트의 제목도, 그래서 부끄러운 거다. 하지만 책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는 점은 굉장히 뿌듯하다.
새해에는 얼마나 읽을 수 있을까. 양보자 질이 중요하다지만 적당한 양이 뒷받침 되지 않는다면 그 또한 무의미하다. 일단 많이 읽고 보자. 일년에 백권. 할 수 있을까?
호텔 파스티스
피터 메일
황보석 옮김
시험 기간엔 정말 책이 잘 읽힌다. 어떤 책이든지 이전에 질질 끌고있었던 책은 시험기간에 끝을 볼 수 있다. 청개구리 심보랄까. 상대적으로 여유로웠던 이번 중간 고사 기간에는 추석 연휴에 KTX안에서 읽으려고 샀던 피터 메일의 소설을 깔끔하게 끝냈다.
프로방스를 사랑하는 작가로 잘 알려진 피터 메일은 '나의 프로방스(A year in provence)'라는 에세이로 처음 만났다. 따뜻하고 재치있는 문체로 나 역시 사랑해 마지 않는 아름다운 프로방스를 그린 그의 글을 읽으며 작가에게 호감을 품고 있던 차였다. 적적하던 어느 날 저녁 집에서 조금 걸으면 있는 헌책방에 구경을 갔다가 발견한 이 두권짜리 소설도 그래서 무척이나 반가웠다.
이 작품은 런던과 뉴욕을 오가는 광고 업계의 성공한 사업가 사이먼 쇼가 돈으로 보상받는 삭막한 일상을 뒤로하고 프로방스에 호텔을 열면서 일어나는 일들과, 프로방스의 거칠고 귀여운 악당들이 준비하는 은행 털이 이야기가 차례로 엮이며 전개된다. 머릿 속에 그리기 쉬우면서도 매력적인 인물들이 세련된 런던, 뉴욕과 풍족하고 아름다운 루베롱 등지를 오가며 일으키는 일들이 정감있고 편안한 가운데 쉽게 읽힌다. 여러가지 에피소드들로 조금 산만한 감도 있지만, 밥알을 곱씹듯 독자가 조금만 집중해서 읽으면 풍성한 재미를 느낄 수 있다.
무엇보다도 매력적인 것은 작가의 문체. 그 감각적인 표현이나 재치있는 묘사 뒤에는 광고 AE로 일했던 작가의 탄탄한 전력이 있다. 하지만 아, 그래서 그렇구나 수긍하기 이전에 이미 피터 메일의 글은 내게 베끼고 싶을 만큼의 센스와 매력으로 가득했다.
번역본을 읽었음에도 순간순간 그의 필담에 감탄할 수 있었던 것은 이미 10여년 전 이 책을 번역한 번역가 황보석씨의 내공 덕분이리라.
이 책을 읽으며 열 세살 때 이후로 10년만에 남자 주인공에게 반해버렸다. 소설을 좋아하지만 소설을 읽고 울거나 주인공에게 감정이입을 하는 경우가 거의 없는 나로서는 반갑고도 즐거운 경험이었다.
사랑에 빠지기 쉬운 남자, 그래서 결혼도 두어번 했지만 전부 이혼으로 마침표를 찍은 부드럽고 유능한 사이먼 쇼. 다시 빠리나 런던으로 가면 그와 같은 남자를 찾을 수 있을까 엉뚱한 생각을 몇번이나 했을 정도로 마음에 들었다. 덕분에 레트 버틀러와 사이먼 쇼를 통해 나이 스물 셋에 드디어 '이상형'을 정립하는 쾌거를 거둘 수도 있었다. 이쯤이면 참, 여러모로 즐거운 독서. 갑자기 리옹을 여행하며 맛보았던 샐러드가 무척이나 그립다.
홀리가든
에쿠니 가오리
김난주
어릴때부터 만화책은 주로 사서 보았다.
늘 읽던 책을 읽고 또 읽고 하는 식이었기 때문에 빌려 보는 것보다, 사는 편이 훨씬 나았거든.
스무살을 먹고 만화책을 훨씬 덜 보기 시작하면서
만화책 대신으로 사모았던 것이 바로 에쿠니 가오리의 책이었다.
요즘은 꼭 만화를 가지고 돌아다니며 읽는 것 같아 외출할땐 챙기지 않지만,
신간이 나오면 궁금해 하면서 꼭 사 읽곤 한다.
그럴땐 꼭 간식을 사먹는 것 같은 기분이라 가볍고 기분도 좋다.
(나는 군것질을 무지무지무지 좋아한다.)
각설하고,
이 작품은 일본에서는 1994년에 출판된 작품인 모양이다.
현재는 어떤 작품을 쓰는지 잘 모르겠지만,
요즘 일본 문학 붐을 타고 그 붐의 A군에 속하는 에쿠니 가오리의 작품을 하나라도 더 찾아내
출판하고자 공을들이는 - 듯한 인상을 주는 - 소담출판사가 내놓은 또 다른 그녀의 예전 작품이다.
국내 출판사의 출판 순으로 이야기들을 읽어왔기 때문에, 작가의 스타일이 어떻게 변해왔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이 작품에는 예전에 읽은 이야기에 등장했던 인물들과 매우 흡사한 인물들로 가득 차 있다.
'웨하스 의자'에 등장했던 여주인공과 비슷한 시즈에, 역시 비슷한 그녀의 애인 '세리자와', '울 준비는 되어있다'에 수록되어 있었던 단편의 주인공 조카와 비슷한 가호의 조카 '쿄코'. 그 외 주인공인 '가호'나 '나카노' 역시 다른 작품들의 인물들과 꽤 닮았다. 하지만 에쿠니 가오리에게 '참신한' 작품을 기대하지 않는 나로서는 그저 그렇구나, 여기고 책을 읽을 뿐이었다.
한가지, 이 작품들을 다 읽고 나면 작가 후기, 작품 해설, 역자 후기가 차례로 나오는데 이 작품 해설이 참 눈여겨 볼 만하다. 내게는 에쿠니 가오리가 여태까지 해온 작품 활동에 대한 이해를 높일 수 있었던 계기였다. 단순히 세련되고 무료하고 감상적인 도시 여성들의 이야기로 치부하기보다도, 작가가 지금까지 해온 이야기들에 담겨있는 그녀의 시선과 대중으로부터 사랑받는 이유를 쉽게 설명해내 마음에 들었다.
초밥
오카모토 카노코
박영선 옮김
그 허망한 소식을 듣고
삼성역에서 홍대까지 멍하니 지하철을 타면 틀림없이 울어버릴 것 같아서
가던길을 돌아 서점에 들러 한참을 서성였다.
'금방 읽을 수 있을만한, 얇고 쉬운 소설' 을 찾고 싶었는데,
처음 고른 책이 파본이었던 탓에 미야베 미유키의 책이 주욱 꽂혀있는 서가를 멍청하게 서성거리다
누군가 책꽂이 위에 슬쩍 얹어놓고 간 이 책을 발견했다.
단편집. 그것도 딱 네 작품 밖에 들어있지 않은 얇은 단편집이었다.
그 날 기분에 일본 소설은 아니었으면 싶은 마음이었지만,
백년 전 사람이었던 작가의 연보를 읽고 마음이 동해
사들고 서점을 나와 천천히 읽으며 돌아왔다.
참신한 작품집이다.
100년 전을 살았던 여인의 감성이라고는 믿기 어려울 만큼
문학적인 재능과 웃음을 머금게 하는 기지가 네 작품의 이모저모에서 반짝인다.
여성적이고 동양적인 감성에 충실하면서도 서구적인 세련미를 보이는 것이
전형적인 여성 작가의 일본 문학답지만 충분히 매력적이다.
'재능'의 힘일까.
음식을 소재로 한 세 작품들은 맛깔스럽고
왠지 엄마의 처녀시절을 떠올리게 하는 단편 '뺨때리기'는 고전적이면서도 익살스럽다.
단 두 페이지의 머릿말 만으로 충분히 '좋은 번역가'라는 인상을 주었던 박영선씨의 번역에서도
기존의 인기 일본 소설 번역가들 이상의 '내공'을 느낄 수 있어 만족스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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