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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헬름 마이스터의 수업시대
요한 볼프강 폰 괴테
안삼환 옮김
민음사

빌헬름 마이스터의 수업시대에 대한 관심은 한 장의 판화에서 비롯되었다. 베를린을 방문했을 때, 그날그날 일정을 만들어 움직이던 나는 문득 비엔나에서 읽은 어느 칼럼 내용을 떠올리고 케테 콜비츠 미술관에 들리기로 결심했다. 나란히 자리한 베를린 문학의 집 내 겨울정원Wintergarten’에서 푸짐한 점심을 먹고 느긋한 마음으로 들린 그 미술관은 그 누구와 마찬가지로 나를 맞이해 샘물을 퍼주듯 소탈한 손길로 넘침도 모자람도 없는 감동을 안겨주었다. 이전까지 단 한 번도 경험하지 못했던, 감흥이라는 단어에 담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일종의 따뜻한 깨우침에 나는 부끄러운 눈물을 흘렸다. 그 가운데 위의 판화 씨앗에 쓸 밀은 빻아서는 안된다 Saatfrüchte sollen nicht vermahlen werden가 있었다. ‘Seed Corn Must Not Be Ground’라는 영문 제목을 메모해두었다가 찾아보니 괴테의 작품에서 발췌된 문장이었다. 귀국하면 곧 찾아 읽기로 결심했다. 내게 그토록 아름다운 경험을 선사한 후에, 콜비츠는 나를 괴테에게로 이끌어 준 것이다.

 

독일 문학에 문외한인데다, ‘빌헬름 마이스터의 수업시대의 문학사적 의의나 교양소설에 대한 사전지식 없이 책을 읽기 시작했기 때문에 초반에는 줄곧 이 작품을 빌헬름 마이스터의 연애시대정도로 생각했다. 세계문학이라는 범주 안에는 참으로 많은 남성 연애 편력기가 있구나, 즐거워하며 이걸 다 읽으면 오래전에 읽다 만 겐지 이야기를 다시 읽어야지 생각하기도 했다. 시종일관 쉬운 남자 빌헬름의 연애는 릴레이 계주 마냥 계속된다. 그러나 그가 연극에 본격적으로 투신하는 중반부에는 '햄릿' 을 읽고 싶어졌다. 빌헬름이 오합지졸 단원들을 모아놓고 햄릿에 대해 열정 충만한 해석을 늘어놓는 부분에서 기억 저편 학부시절 문학의 언저리에서 맛보았던 즐거움이 다시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리고 포스트잇을 얇게 잘라 만든 스티커를 붙여가며 후반부를 읽는 동안에는 괴테를 비단 소설가라 칭할 수 없는 이유를 알 듯 했다. 초중반부 부터 빌헬름이나 그 외 등장인물들의 입을 빌어 들려주는 인간 군상에 대한 괴테의 성찰에서는 이미 재주 있는 이야기꾼, 재능있는 작가의 경지를 넘어선 현인의 면모가 엿보였다. 그런데 더 놀라운 것은 괴테의 장기자랑이 거기서 끝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작품 막바지에 이르면 등장인물들의 과거사와 출생의 비밀이 숨막힐듯 전개되어 막장드라마는 명함도 못 내밀 말초자극이 연타로 찾아오니, 무려 4세기동안 책을 팔 수 있는 베스트셀러 작가의 흥행력에 탄복할 따름이다. , 하나 잘하는 놈 다 잘한다더니, 미남인데다 머리 비상하고 능력 있고 풍류도 알면서 명까지 긴 이 말도 안 되는 남자는 왜 18세기에 태어난 것인가. 아니 도민준도 사백 살이라면서, 어딘가에서 천송이 같은 여자와 여전히 연애 중이신가. 그런 건가 괴테도.

 

그런 생각들을 하며 책을 읽었다. 그런데 막상 마지막 장을 덮고 보니 다음으로 무엇을 읽어야 할지 영 모르겠는 상태가 되고 말았다. 다만 파고 또 파도 공부할 거리가 나오는 이런 바이블 같은 작품은 일자무식 문외한도 밀쳐내는 법 없이 무언가 하나쯤은 들려 내보내는 법이니, 마지막으로 얻어 걸린 키워드는 교양소설이다. 독일 문학사에서 중요하게 다루는 소설 유형으로 개인의 자아형성과 사회 통합을 주요 골자로 하는 소설들이 이 범주에 속한다는데, 그중에서도 괴테의 빌헬름 마이스터의 수업시대는 교양소설의 본보기라니 나 이런 책 읽었노라 뽐내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는 것이다. 그 외에도 비루한 힙스터들마저 끌어안는 넓은 가슴의 작가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 ‘유리알 유희역시 교양소설의 대표작에 속하나니 바야흐로 나 빼고 모두가 읽었다는 헤세에 손을 댈 때가 오고야 말았다.

 

이 책을 읽는 동안 책 밖 일상에서는 여러 가지 일들이 있었다. 얼마 전부터 몹시 마음에 드는 일자리를 하나 얻어 무슨 일이 있어도 삼년은 관두지 않겠다는 다짐을 반복하며 랄라랄라 다니는 중인데 최근 같이 일하는 아저씨가 남성 갱년기 증상으로 동료들을 들들 볶아 행복한 나까지 우울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일을 시작하고 마음에 안 드는 게 하나도 없다 불똥을 맞고 보니 발걸음도 가볍던 출근길이 순식간에 보통 출근길이 되어버렸다. 본래 우울이란 게 몇 방울이라도 한 번 물이 들면 사실은 그렇지도 않건만 빨아서 아무리 야무지게 짜내도 영영 깨끗하게 빠지지 않을 것만 같다. 무언가 그런 분위기가 이어져 영 심기가 불편하던 어느 날 퇴근길에 읽은 괴테의 일생과 파우스트에 대한 칼럼은 그런 내 감정의 얼룩을 한방에 말끔하게 지워버렸다. 천재의 빼어난 일생과 빼어난 업적은 범재를 좌절하게만 하는 것 같지만 때로는 햇볕과도 같다. 그런 절대 우위의 본보기가 어슴푸레한 속을 침울하게 더듬는 범인의 마음을 밝혀주기도 하는 것이다. 볕은 만인의 머리 위를 비추고 머리카락 사이의 곰팡이를 털어주며 비타민 D도 보충해준다. 고전은 그런 존재이기에 의지해 살 만한 것이다.    

2014/02/17 15:11 2014/02/17 15:11

한 낮인데도 어두운 방
에쿠니 가오리
신유희 역


오랜만에 읽는 에쿠니 가오리였다. 매 년 한 권에서 두 권 정도 번역되는데, 귀국해보니 신간 두 권이 밀려있었다. 넉넉한 기분이 들어 좋았다.

의식하지 못했지만 열 여덟 무렵부터 시작해 10 년 넘게 에쿠니를 읽어왔다. 알게 모르게 내 생활과 취향에 영향을 주었으리라. 솔직히 도스토예프스키나 괴테에 매혹되어 십 년을 읽었더라면 나는 좀 더 괜찮은 젊은이가 되지 않았을까 생각하기도 한다. 그러나 어쩌랴, 지나고 보니 10년이다. 그리고 나는 가볍고 감성적이고 미시적인 일상에 일희일비하는 그저 그런 이십 대였다.  

이제야 2000년 대 한국에 소개되기 시작한 에쿠니와 일본 독자들이 생각하는 에쿠니가 조금 다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한다. 오랫동안 아동문학에 천착해온 작가라는 점을 나는 그저 작가 정보의 일부 정도로 인식하고 있었을 뿐이다. 하지만 '한 낮인데도 어두운 방'을 읽은 후 책장에 꽂힌 에쿠니들의 면면을 들여다 보고 있자니 내가 간과해 왔을 뿐, 아동문학과 에쿠니가 가지는 접점이 그녀의 작업 전반에 있어 주요한 일면이었다는 생각이 비로소 든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에쿠니는 사실 에세이이고, 그 다음은 등장 인물들의 내면이야 어떠하든 어른들의 일상을 다룬 소설이다. 시나 아동 문학 작품들은 그 외의 범주에 들어가고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내 입맛이 남다를 것이 없는지, 그런 계통의 작품들은 국내에 번역되는 경우도 드물다. 예를 들어 딱히 어린이를 위한 작품은 아니지만 아동문학적인 색채를 띈 작품 중 하나인 '나의 작은 새' 같은 경우, 다른 소설이나 에세이들에 비해 자주 꺼내보지 않는 편이다.  

'한 낮인데도 어두운 방'은 굳이 분류하자면 '나의 작은 새'와 같은 군에 속할텐데, 아동 문학의 어조로 어른들의 일상을 이야기하는 작품이라는 점에서 색다르다. 그러나 에쿠니가 그리는 이야기 만큼이나, 혹은 그 이상으로 그녀의 심플하고 세련된 톤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독자들에게 즐거움을 안기기는 어려운 소설이 아닌가, 생각한다.

에쿠니 가오리의 소설들은 고급 양과자점의 구움과자들 같다. 심플한 재료에 넘치지도 부족하지도 않은 정성과 일정한 노련함을 들여 구워낸 과자들. 달걀과 버터, 밀가루와 설탕에 기대할수 있는 맛을 낼 뿐이지만 얼마간에 한 번 씩 궁금해 질 때면 생각이 나는 것이다.

 
2013/10/18 15:10 2013/10/18 15:10

Le jugement de Paris

from Tous Les Jours 2013/10/06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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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파리에서 예정했던 2 년을 마치고 돌아왔다. 그곳에서 부친 책 스무상자와 살림 열 여섯 상자도 어제 부로 빠짐없이 한국에 도착했다.

프랑스 대사관 앞에서 새파랗게 질려 서류를 쓰던 그 날부터 파리 경시청 문밖에서 전화기를 붙들고 신발을 열 여덟번 내뱉던 어느 날을 지나 길게 늘어선 보딩 라인을 외면한 채 드골에서 보낸 반나절에 이르기까지, 늘 좋았던 것은 결코 아닌데도 미웠던 순간이 기억나지 않는다. 내 지난 사랑은 그렇게 아둔하고 맹목적이었다.

나는 파리에게 권력도, 지혜도, 지상 최고의 미인도 약속할 수 없었으나 그가 가진 황금사과를 끝없이 갈망했던 탐욕스러운 이방인이었다. 지칠 줄 몰랐던 젊은 열정의 댓가로 나는 황금보다 아름답고 꿀보다 농밀한 기억을 얻었다. 내가 파리의 품에 안겨 홀로 보낸 두 해는 지상의 다른 그 누구도 모르는, 나만이 알고 기억하는 시간들이다.

욕심 사나운 나는 그 지난 시간을 기억에 묻지 못하고 오만가지 잡동사니에 불어넣어 서른 여섯개의 상자와 세 개의 여행가방에 봉해 돌아왔다. 오래 비워두었음에도, 내 자리는 바로 어제까지도 엉덩이를 붙였던 것처럼 따뜻하고, 내 집은 내 빈틈에 온기를 불어넣는다. 이제는 내가 있어야 할 곳에서 담아온 배움과 행복을 기쁘게 나눌 때라고 믿는다.

그 동안 애정과 우정으로 나를 생각하고 기다려 준 오랜 벗들에게 감사한다. 더불어 혼자 무엇이든 해낼수 있다 자만하는 독선을 내버리지 않고 외로운 시간에는 따뜻한 대화를, 곤경 앞에서는 도움을 아끼지 않았던 파리의 친구들에게 진실한 감사를 전하고 싶다.


 

*Le jugement de Paris, Rubens, National Gallery




 

2013/10/06 20:00 2013/10/06 20:00

2013 LONDON - June

from Bon voyage! 2013/07/12 20:59

London

28/06/2013 01/07/2013

UOL College Hall


China town/ BFI Terrace bar/ Barbican art center/ Columbia road flower market East London Sunday*/ Ronnie Scott/ Persephone Books

Liberty/ House of Fraser/ Harrods
Bar Italia/ Monmouth coffee/ Workshop coffee
Princi/ Thai metro/ Dishoom
Neal’s yard dairy

Tate modern - Ellen Gallagher
Photographer’s gallery
Wallace Collection
British Museum



딤섬, 버블 티, 버터크림 케이크, 그리고 배가 볼록한 금붕어 빵이 헤엄치는 곳, 차이나타운. 금요일 밤 소호의 바 이탈리아, 커피를 마시고 피칸 파이를 들쑤시며 들었던 스파이스 걸즈의 워너비Wannabe. 

작가와 장인, 테이트 모던 엘런 갤러거 회고전. 깍지콩 샐러드와 단호박 페타치즈 점심, 알란야우의 밀라노 풍 카페 프린치. 코벤트가든 참새방앗간, 몬머스 커피 아이스 라테. 파란 하늘과 핌스와 샴페인, 하릴없이 술술 흘러간 템즈 강변의 오후. 샬롯 스트리트 타이 메트로와 그 앞 집 요거트 아이스크림, 선선하던 그 저녁.

선데이 로스트 말고 이스트 런던 선데이. 아이스 라테, 살구와 피스타치오가 박힌 멋진 치즈 크래커와 말린 망고, 침이 고이는 나의 목적지 로 아 라 부슈.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들은 라이밴 락 스피릿 어린이의 따사롭던 기타 연습곡. 저지 팬츠에 플립플랍을 끌고 나와 꽃을 사던 이스트 런더너들. 살짝 추워질 즈음 종일 브릭레인과 콜럼비아로드를 쏘다니며 골목에서 한 개씩 파는 굴을 사먹고 델리에서 커피를 마시고 저녁에는 달스턴으로 건너가 음악을 듣는 그런 언젠가. 비둘기에게 뺏긴 쇼트 브레드와 홍차, 일요일 오후 한가롭던 바비칸 아트센터 푸드 홀. 사진의 시사성과 도발성, 도이체 뵈르제* 사진 상 후보 작가 전시, 포토그래퍼스 갤러리. 리버티 하면 리버티 원단. 하우스 오브 프레이저에는 비스타 알레그레가 있다. 내 인생 최고의 테이크 파이브, 로니 스콧.

*독일 증권거래소

프라고나르와 호흐의 월레스 컬렉션. 하늘색 커피 잔처럼 가볍고 섬세한 로스팅, 워크샵 커피. 다른 백화점에 있는 물건은 해로즈에도 있고, 다른 백화점에 없는 물건은 해로즈에 있다. 잉글리쉬 체다는 닐스 야드 데어리. 차이와 치킨 티카 마살라 롤, 월요일엔 주사위를 굴려요, 디슘. 지적이면서도 편안한 매력, 블룸즈 버리와 페르세포네 북스. 이제는 안녕, 대영박물관.


SOUVENIRS

리버티 손수건 세 장,
치즈 크래커와 말린 망고.
비스타 알레그레 브랙퍼스트 컵
참새 무늬 드레스
가디언과 옵저버
월레스 컬렉션 기념 접시 세장
핌스 한 병
요크셔 티 한 박스


2013/07/12 20:59 2013/07/12 20: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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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들의 황혼
Le crépuscule des dieux (Gotterdammerung)
WAGNER
Paris Opéra Bastille
(le 3 juin 2013)


바그너 링 사이클 마지막 장을 보고 왔다. 그 새 시간이 이렇게 되었다. 작년 말 오페라 네 편을 예매하며 느꼈던 막연함은 분명하고 개인적인 감상으로 남았다. 지난 2월부터 한 달에 한 편 꼴로 공연 일정을 따라가는 동안 흥미를 잃기도 하고, 졸기도 하고, 객석에 앉은 채 집에 가고 싶어 한 적도 여러 번이다. 이전에도 썼지만 나는 바그네리안도 아니고, 오페라를 좋아하지만 잘 알지는 못한다. 링 사이클을 선택한 데는 내 허영 섞인 호기심이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고 생각한다. 바그너와 그의 음악을 둘러싼 수많은 담화 속 에서 나는 내가 모르는 그의 음악을 알고 싶었고, 무엇보다도 일단 경험하고 싶었다. 공연을 올리는 입장에서도 부담이 적지 않은 프로그램인 탓에 시기도 맞아줘야 하는데, 내 프랑스 체류와 파리 오페라의 일정이 맞았다. 연이라고 생각했다.

 

링 사이클을 보고 있노라 이야기하면 대부분의 지인들은 내 호기와 인내심을 칭찬해주었다. 앞서 말했듯 겨우 자리만 지킨 순간도 없지는 않았지만 ‘니벨룽겐의 반지는 단순히 러닝 타임만으로 청중을 압도하고 버티기만을 요구하는 작품은 아니다. 작품 자체는 오히려, 청중이 원하는 청각적 즐거움을 끊임없이 선사한다. 그것은 때로 여느 오페라에서 듣기 힘든 가수의 힘찬 노래이기도 하고, 어느 순간 귓전에 걸리는 익숙한 모티브이기도 하고, ‘발퀴레의 비행과 같은 말 그대로 선동적인 선율이기도 하다. 일례로 청중이 원하는 것을 쉽사리 내주지 않는 현대음악의 괴로움 물론 그 안에는 다른 즐거움이 깃들어 있지만 - 을 생각하면, 바그너의 음악은 여전히 우리에게 클래식한 의미에서 듣는 기쁨을 선사한다.

 

무대는 다시 원점으로 돌아간 듯 미니멀했다. ‘라인의 황금만큼 실망스럽지는 않았지만 전체적으로 보면 파리 오페라의 연출은 크게 만족스럽다 말하기 어렵다. 하지만 앞서 언급한 현대 음악이 그렇듯, 관객이 원하는 것을 부러 주지 않는 것이 현대 예술이 지닌 한가지 성향이라면 그런 의미에서 2013년 파리의 링 사이클은 그 연출 만큼은 매우 현대적이었다고 말할 수 있겠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마지막 신들의 멸망 장면에서 경악을 금치 못했다. 무대에 설치한 스크린위에 FPS(First-person shooter; 1인칭 슈팅 게임) 게임의 한 장면처럼 신들을 총으로 쏘아 쓰러트리는 영상을 띄웠는데, 정말 뜬금없기로 이 지구상에 따라갈 자가 없는 연출이었다. 오페라신에 FPS를 못쓸 이유는 없다. 문제는 스크린에 영사된 영상이 이해할수 없을정도로 조잡해 이전 네시간동안 유지해온 일종의 미니멀한 고급스러움을 다 마신 콜라캔처럼 한방에 찌그러트려버렸다는 것이다. 게다가 객석의 칠할은 중년 이상, 절반은 백발의 노신사,부인들이 채우고 있었는데 그 레인보우식스도 울고 갈 총질 앞에 그분들의 당혹은 이해하고도 남음이다. 진정 파리 오페라가 원하는 것은 아방가르드였던가. 한숨이 나왔다.

  

여하튼 다섯 달에 걸쳐 네 번을 만나는 동안 음악이 귀에 붙어 따라가기 수월해진 덕에 네시간 십오분의 러닝타임과 한시간 반의 인터미션은 전에없이 물 흐르듯 지나갔다. 그리고 그런 내 반응에 반가움과 기쁨을 느꼈다. 당연하다 못해 진부한 이야기지만, 음악도 영화도 그림도 그리고 음식도, 그 어떤 것이건 일단 경험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그러한 경험의 축적을 통해서 얻을 수 있는 것이 안목이다. 안목이란 단순히 가장 좋은 것, 가장 고급스러운 것을 알아보는 눈이 아니다. 일차적으로 각각의 대상을 마주했을 때 그 대상에 대해 개별적인 견해를 내놓을 수 있는 능력이 바로 안목이다. 보는 눈이 있으면 자연스레 본인의 기준에 따른 줄세우기도 가능할것이다. 안목이 귀한 것은 경험치를 자랑할 수 있기 때문이 아니다. 그런 눈을 통해 비로소 진정한 지각의 즐거움을 누릴 수 있고 더 나아가서는 순수하게 본인을 즐겁게 하는 아카이브를 만들어 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러한 모든 과정의 소실점은 결국 나를 아는 것이 아닌가, 그런 생각을 한다.


덧붙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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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6/08 23:55 2013/06/08 23:55

별일없이

from Tous Les Jours 2013/06/03 03:34
1.
아... 피곤하다.

2.
식이조절에는 상심이 최고. 입맛 뚝. 오래가길.

3.
조용히, 읽고 쓰고. 그렇게.
2013/06/03 03:34 2013/06/03 03:34

이효리 '미스코리아' MV

공들여 구상한 컨셉임은 분명해 보이지만 곳곳에서 시안이 너무 보인다. 독창성 부족.
세련된 화장, 의상, 연출, 편집. 스텝들의 퀄리티가 엿보였다.
음악적 진행은 나쁘지 않으나 가사의 리듬감은 아쉽다.
안일했던 안무, 그보다 더 문제는 더 이상 꾸준히 연습하지 않음을 여실히 드러낸  전직 댄스가수의 율동.
가장 문제라고 생각되었던 부분은 퍼포머로서 실망스러운 수준인 이효리의 화면 장악력.
완벽하게 연출되는 뮤직비디오에서조차 흡인력을 느낄 수 없다면 라이브 무대에는 기대할 게 없으리라고 봄. 원래 이 정도로 끌어당기는 힘이 없는 스타는 아니었는데, 새 앨범 준비 스트레스로 인해 집중도가 좀 떨어지셨던 모양.

어쨌든 반응이 좋아 다행.


투피엠 '이 노래를 듣고 돌아와'

베이비(들), 이러지 말아 제발.


 




 

2013/05/06 17:17 2013/05/06 1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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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is Opera National
Siegfried
2013 Opera Bastille

오후 여섯시에 바스티유에 들어가 열 한시를 훌쩍 넘겨 나오는 프로그램은 역시 만만치 않다. '발퀴레'에 비해서 음악이 세지 않고, 스토리면에서도 드라마틱한 요소가 좀 덜하기 때문인지, 공연 시간에는 큰 차이가 없는데 후반으로 갈 수록 굉장히 지치는 느낌이었다. 나중에는 눈과 귀를 열어놓고 정신줄은 놓는 지경에 이르렀다. 세시간 오십오 분. 네시간에 달하는 공연을 내내 집중해서 본 다는건 평소에도 남다른 산만함을 자랑하는 내게 애시당초 미션임파서블이었다. 게다가 앞서 두 번의 공연에서, 중간중간 찾아오는 좋은 대목을 더 맑은 정신으로 즐기기 위해서는 졸리면 졸고, 자막을 읽기 싫으면 무슨 얘긴지 모르고 넘어가는게 낫더라는 결론을 얻었기 때문에, 나는 적당히 졸고, 적당히 지루해하는가 하면, 때로는 눈을 크게 뜨고 때로는 웃어가며 니벨룽의 반지 제 3 장, '지크프리드'를 봤다.

가장 좋았던 것은 무대, 센scène이었다. 1, 2, 3 막이 모두 마음에 들기는 처음이었다. 이번에 느낀 건데, 나는 컬러풀하거나 세부적인 무브먼트가 있는 센을 좋아하는 것 같다. 예를 들면, 1막에서는 무대 위 식물들의 초록과 빨간 소품들의 대비가 마음에 들었는데, 그 색감에서 어딘가 모르게 어린아이가 있는 집의 분위기를 느꼈다. 지크프리드를 데려다 키운 난쟁이 미메의 이야기를 자연스럽게 전달함은 물론, 시각적으로도 아름다운 센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2막에서 대장간의 큰 환기팬이 실제로 돌아가며 무대위에 움직이는 그림자를 만든다거나, 인두에 빨간 불이 들어왔다 꺼진다거나 하는 부분들에도 눈이 갔다. 왜 그런 데 반응하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어린시절부터 인형의 집 주방 놀이의 오븐에 실제로 빨간 불이 들어온다거나 냉장고에 플라스틱 우유곽이 들어있다거나 하는 데 무척 감동하곤 했다.

이번에도 가수들의 노래에는 감탄에 감탄을 거듭했다. 지크프리드 역의 토르스텐 컬 Torsten Kerl은 그 긴 공연 내내 쉬질 않는데도 시종일관 힘차면서도 편안한 - 힘있는 후륜구동 독일명차의 안정적인 승차감을 떠올리게 하는 - 노래를 들려주었다. 게다가 두려움을 모르는 어린 지크프리드를 어찌나 그렇게 천진하게 연기하시는지. 지크프리드가 나무가지를 질질 끌며 무대에 등장하는 순간 그 귀여움에 웃음을 터뜨린 관객은 나 뿐이 아니었다. '발퀴레'에서부터 완벽한 브륀힐데로 눈길을 끌던 알윈 멜러Alwyn Mellor 는 이번에도 비범하고 아름다운 브륀힐데로 분했다. 사실 가수들에게 노래 잘한다는 이야기는 우스울수 있지만, 모든 오페라 가수가 공연장을 나올 때, 노래가 정말 좋았다는 생각에 브로셔를 한번 더 찾아보게 하지는 않는다. 이 날의 가수들은 그런 사람들이었다.

내용을 몰랐던 것은 아니지만, 공연을 다 보고서 불현듯 떠오른 농담이 있었다. "네 남자친구 태어났대. 가봐." '발퀴레' 에서 지크프리드의 부모인 지그문트와 지클린데를 지켜주고 그 벌로 영원의 잠에 빠졌던 브륀힐데는 (우리식으로는 조카 뻘인) 지크프리드의 키스로 긴 잠에서 깨어나 그와 사랑에 빠진다. 돌고 도는 인간사, 이러한 선견지명이 있었기에 신화의 세계는 오늘 날에도 그 가치를 인정받는 것이로구나. 그런 생각을 하며 나는 잰 걸음으로 바스티유를 빠져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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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4/08 00:15 2013/04/08 00:15

잡동사니

from Le Signet 2013/03/19 05:20

남편을 알기 전에도 누군가를 좋아한 적은 있었다. 애인이 없을 때보다 있을 때가 훨씬 즐거웠다. 그때마다 상대를 진심으로 사랑했고 지금도 사랑하고 있다. 내 생각이긴 하지만, 만약 정말로 연애 관계 이외의 것을 바라지 않고 지낼 수 있다면 애인을 만드는 것은 간단한 일이다. 내 시간과 육체, 거짓 없는 말, 그리고 호의와 경의. 내가 줄 수 있는 건 그것뿐이었지만, 그 다섯 가지를 받고 만족하지 않는 남성은 없다.
그래서 남편을 좋아하게 되었을 때도 나는 그 다섯 가지를 주고 남편에게서도 똑같은 것을 받았다. 고작 다섯 가지! 그것만으로 충분할, 고작 그 다섯 가지. 하지만 우리는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다. 제정신이 아니었던 것이리라. 우리의 탐욕은 끝이 없었다. 낮이고 밤이고 몸을 섞고, 낮이고 밤이고 말을 섞고, 함께 살면서도 여전히 성에 차지 않아 더한 속박을 바라고 소유를 바라고 질투와 말다툼을 바랐다. 서로를 모조리 갖고 싶었던 것이다. 나는 그의 존재를 바라고 그의 부재가 가져다주는 공허함도 바랐다. 그이만이 내게 줄 수 있는 감미로움을 바라는 것과 거의 같은 크기로, 그이만이 내게 줄 수 있는 고통을 바랐다.
그리하여 우리는 결혼했다. 서로 모든 것을 주고, 받은 것 전부를 맛보기 위해.
 --- pp.160-161, 잡동사니, 에쿠니 가오리


정말로 연애 관계 이외의 것을 바라지 않고 지낼 수 있다면.
내 시간과 육체, 거짓 없는 말, 호의와 경의.


요즘 드문드문 스스로 묻는 물음에 대한 그녀 나름의 대답을 아직 사 읽지도 않은 책 소개 페이지에서 만났다.
무수한 폄하에도 늘 에쿠니 가오리를 좋아해온 내 애정에 대한 답가를 받은 듯 하다.  

2013/03/19 05:20 2013/03/19 0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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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is opera national
L'Anneau de Nibelungen - La Walkyrie /R. Wagner
2013 Opera Bastille




'라인의 황금'을 보고 난 감상이 실망에 가까운 것이었기 때문인지, 이어지는 '발퀴레'에 대한 설렘은 반감에 반감을 거듭, 급기야 티켓을 끊고 나면 공연 전까지 의식적으로 몇 번은 하는 '귀에 붙이기(전체 감상)'는 커녕 1막만 겨우 찾아 듣고 마는 무성의로 한 달을 보냈다. 좋아하는 밴드의 공연 일정이 잡히면 열심히 떼창 준비를 하며 복습을 하듯, 장르를 불문하고 공연을 만끽하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 준비라는 게 필요하다. 게다가 나는 바그네리안을 자청할 수 있는 수준도 못 되기 때문에 그런 밑준비 없이 가서는 못 따라가고 잠들게 뻔 했는데도 영 의욕이 생기질 않았다.

바그너의 음악극에 대한 정보를 찾다 보면 통상 쉽지 않다, 입문하기 어렵다는 인식을 마주하게 된다. 나도 어느 정도는 동감한다. 일단 오페라 팬이라면 상대적으로 익숙할 이탈리아 오페라의 형식 (레치타티보 + 아리아)을 취하지 않기 때문에 극을 따라가며 자연스레 강 약 중강 약 하는 식으로 조절하게 되는 집중의 리듬 타기가 상대적으로 까다롭다. 게다가 길기는 또 오지게 길어서, '라인의 황금'은 중간 휴식없이 두시간 반을 내리 달리고, '발키리'는 순 공연 시간만 세 시간 사십 오 분이다. 체력 좋은 독일 작곡가 답다.

하지만 그 어렵다는 바그너에 일단 덤비고 보는데는 이유가 있다. 아리아나 레치타티보가 없는 대신, 그의 음악극에는 특정 인물이나 장면을 상징하는 유도동기가 끊임없이 등장하는데, 현대의 영화나 드라마 배경음악에 익숙한 사람이라면 이런 음악적 장치가 아주 낯선 것은 아니다. 기본적으로 특정 선율을 기억하고 있으면 극을 따라가는데 도움이 되고, 특히 '발퀴레'는 많은 영화 감독, 음악 감독들의 사랑을 받은 작품이었던지라 직간접적인 매체 노출이 많았다. 의외로 '들으면 아는' 대목이 많은 작품인 것이다.
 
때문에 힘들기만 한 작품은 아니었다. 네시간에 달하는 공연 도중에 집중이 흐트러지기도 하고 졸리기도 했지만 나의 무성의함에 비하면 무척 친절한 공연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또, 전편에서 느낀 실망의 가장 큰 원인이었던 연출이 이번에는 상대적으로 괜찮았다는 점도 도움이 되었다. 더 휘황찬란한 눈요기를 제공했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아직 전 작품을 다 본 상태가 아니기 때문에 운을 떼기는 조심스럽지만, 내가 본 링사이클 절반과 다른 작품까지 통틀어 느낀 바, 대부분의 경우 파리 오페라 나시오날의 연출은 분명 일정 수준 이상이지만 '화려하게, 더 화려하게 spectacular! spectacular!'를 지향하는 쪽은 아니다.

조금 다른 이야기이지만, 파리의 오페라 신은 그 이미지에 비해 그리 화려하지도, 사치스럽지도 않다. 유럽 경기 침체가 당장은 문제이겠지만, 그렇지 않을 때에도 언제나 예산 문제가 걸려있기 때문이다. 프랑스는 문화계에 어마어마한 예산을 투입하는 몇 안되는 국가들 가운데 형님 격이고 어느 정도 장사도 잘 하는 편이지만, 사실 그것은 우리가 각종 매체를 통해 자주 조명하는 것 처럼 문화산업과 수익성을 기반으로 한 모델이 아니다. 현대에 지어진 오페라 바스티유의 모토가 오페라의 대중화였듯 파리의 문화 예술계는 '더 많은 돈을 낼 수 있는 사람들을 위한 최상의 혜택'이 아닌 '더 많은 예술애호가들에게 혜택을 줄 수 있는 방향'에 촛점이 맞춰져 있다. 물론 이곳에도 문화 예술을 향유하는 계층과 그들의 경제력 간의 끊을수 없는 연결고리가 존재한다. 허나 앞서 말한 프랑스 예술계의 모토는 더 많은 예술가들과 예술 애호가들을 끌어 안는 원동력임이 틀림없다.

그래서 한풀만 벗겨보면, 프랑스 문화계 종사자들은 언제나 예산 문제로 골치를 앓고 있다. 성공에 성공을 거둔 호퍼의 그랑팔레 전시의 이면에는 예산확보를 위한 대관사업과 작품 대여료 인하를 위한 눈물겨운 네고가 있었다. 매 두 달에 한번 쯤 오페라 나시오날에서는 업커밍 공연들의 할인 혜택을 적은 우편물을 보내온다. 순수한 소비자인 나는 모른다. 나는 언제나 돈을 조금이라도 덜 내기 위해 노력한다. 하지만 내 사치스러운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한 예술소비와 더, 더, 더를 외치는 일은 관둘 때가 되었다. 그것은 내가 사랑한다고 믿는 예술과, 그 예술을 위해 일하는 사람들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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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3/12 21:32 2013/03/12 21:3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