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리두기

from Tous Les Jours 2007/10/30 20:54

뱉은 만큼 후회한다.

머금은 이야기들도,

뱉었더라면 후회했을거야.

그만 생각하고 싶다.




2007/10/30 20:54 2007/10/30 20:54


호텔 파스티스
피터 메일
황보석 옮김


 시험 기간엔 정말 책이 잘 읽힌다. 어떤 책이든지 이전에 질질 끌고있었던 책은 시험기간에 끝을 볼 수 있다. 청개구리 심보랄까. 상대적으로 여유로웠던 이번 중간 고사 기간에는 추석 연휴에 KTX안에서 읽으려고 샀던 피터 메일의 소설을 깔끔하게 끝냈다.

 프로방스를 사랑하는 작가로 잘 알려진  피터 메일은 '나의 프로방스(A year in provence)'라는 에세이로 처음 만났다. 따뜻하고 재치있는 문체로 나 역시 사랑해 마지 않는 아름다운 프로방스를 그린 그의 글을 읽으며 작가에게 호감을 품고 있던 차였다.  적적하던 어느 날 저녁 집에서 조금 걸으면 있는 헌책방에 구경을 갔다가 발견한 이 두권짜리 소설도 그래서 무척이나 반가웠다.

 이 작품은 런던과 뉴욕을 오가는 광고 업계의 성공한 사업가 사이먼 쇼가 돈으로 보상받는 삭막한 일상을 뒤로하고 프로방스에 호텔을 열면서 일어나는 일들과, 프로방스의 거칠고 귀여운 악당들이 준비하는 은행 털이 이야기가 차례로 엮이며 전개된다. 머릿 속에 그리기 쉬우면서도 매력적인 인물들이 세련된 런던, 뉴욕과 풍족하고 아름다운 루베롱 등지를 오가며 일으키는 일들이 정감있고 편안한 가운데 쉽게 읽힌다. 여러가지 에피소드들로 조금 산만한 감도 있지만, 밥알을 곱씹듯 독자가 조금만 집중해서 읽으면 풍성한 재미를 느낄 수 있다.  

 무엇보다도 매력적인 것은 작가의 문체. 그 감각적인 표현이나 재치있는 묘사 뒤에는 광고 AE로 일했던 작가의 탄탄한 전력이 있다. 하지만 아, 그래서 그렇구나 수긍하기 이전에 이미 피터 메일의 글은 내게 베끼고 싶을 만큼의 센스와 매력으로 가득했다.
 번역본을 읽었음에도 순간순간 그의 필담에 감탄할 수 있었던 것은 이미 10여년 전 이 책을 번역한 번역가 황보석씨의 내공 덕분이리라.
 
 이 책을 읽으며 열 세살 때 이후로 10년만에 남자 주인공에게 반해버렸다. 소설을 좋아하지만 소설을 읽고 울거나 주인공에게 감정이입을 하는 경우가 거의 없는 나로서는 반갑고도 즐거운 경험이었다.
 사랑에 빠지기 쉬운 남자, 그래서 결혼도 두어번 했지만 전부 이혼으로 마침표를 찍은 부드럽고 유능한 사이먼 쇼. 다시 빠리나 런던으로 가면 그와 같은 남자를 찾을 수 있을까 엉뚱한 생각을 몇번이나 했을 정도로 마음에 들었다. 덕분에 레트 버틀러와 사이먼 쇼를 통해 나이 스물 셋에 드디어 '이상형'을 정립하는 쾌거를 거둘 수도 있었다. 이쯤이면 참, 여러모로 즐거운 독서. 갑자기 리옹을 여행하며 맛보았던 샐러드가 무척이나 그립다.


 


       

2007/10/28 18:56 2007/10/28 18:56

홀리가든
에쿠니 가오리
김난주


어릴때부터 만화책은 주로 사서 보았다.
늘 읽던 책을 읽고 또 읽고 하는 식이었기 때문에 빌려 보는 것보다, 사는 편이 훨씬 나았거든.
스무살을 먹고 만화책을 훨씬 덜 보기 시작하면서
만화책 대신으로 사모았던 것이 바로 에쿠니 가오리의 책이었다.

요즘은 꼭 만화를 가지고 돌아다니며 읽는 것 같아 외출할땐 챙기지 않지만,
신간이 나오면 궁금해 하면서 꼭 사 읽곤 한다.
그럴땐 꼭 간식을 사먹는 것 같은 기분이라 가볍고 기분도 좋다.
(나는 군것질을 무지무지무지 좋아한다.)

각설하고,
이 작품은 일본에서는 1994년에 출판된 작품인 모양이다.
현재는 어떤 작품을 쓰는지 잘 모르겠지만,
요즘 일본 문학 붐을 타고 그 붐의 A군에 속하는 에쿠니 가오리의 작품을 하나라도 더 찾아내
출판하고자 공을들이는 - 듯한 인상을 주는 - 소담출판사가 내놓은 또 다른 그녀의 예전 작품이다.

국내 출판사의 출판 순으로 이야기들을 읽어왔기 때문에, 작가의 스타일이 어떻게 변해왔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이 작품에는 예전에 읽은 이야기에 등장했던 인물들과 매우 흡사한 인물들로 가득 차 있다.
'웨하스 의자'에 등장했던 여주인공과 비슷한 시즈에, 역시 비슷한 그녀의 애인 '세리자와', '울 준비는 되어있다'에 수록되어 있었던 단편의 주인공 조카와 비슷한 가호의 조카 '쿄코'. 그 외 주인공인 '가호'나 '나카노' 역시 다른 작품들의 인물들과 꽤 닮았다. 하지만 에쿠니 가오리에게 '참신한' 작품을 기대하지 않는 나로서는 그저 그렇구나, 여기고 책을 읽을 뿐이었다.

한가지, 이 작품들을 다 읽고 나면 작가 후기, 작품 해설, 역자 후기가 차례로 나오는데 이 작품 해설이 참 눈여겨 볼 만하다. 내게는 에쿠니 가오리가 여태까지 해온 작품 활동에 대한 이해를 높일 수 있었던 계기였다. 단순히 세련되고 무료하고 감상적인 도시 여성들의 이야기로 치부하기보다도, 작가가 지금까지 해온 이야기들에 담겨있는 그녀의 시선과 대중으로부터 사랑받는 이유를 쉽게 설명해내 마음에 들었다.





2007/10/28 16:00 2007/10/28 16:00


요즘 비가 드물어서, 비야 온나 비야 온나 마음 속으로 빌고 있던 차에 저녁에 비가 내렸다.

기쁨을 주체할 수 없어서 얼른 잠옷을 갈아입고
집에서 좀 떨어진 찻집에 나가 한시간쯤 보내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장발의 왜소한 아저씨가 대뜸 대리운전기사라며 말을 걸고는
TGIF 앞에서, 내가 영어를 몰라 그러는데 이게 VIPS 냐고 물으셨다.

아뇨, VIPS는 저기 저 건너편인데요, 간판이 녹색에 빨간색이에요.
저 만치를 가리키며 대답해드리자 아저씨는, 아 내가 영어를 몰라서.
하고 다시 한번 멋적어하시며 반쯤 망가진 우산을 들고 VIPS 쪽으로 뛰어가셨다.

그 길가에 멍하니 섰다가, 빨갛고 하얀 TGIF 간판을 올려다보는데
갑자기 밀려 올라오는 짜증.

빌어먹을 것들이, 영어 밑에 한국말로 티.지.아이.프라이데이 라고 좀 써놓으면
간판쟁이가 간판값을 더 받기라도 하나.
지들이 한국에서 영업하지 미국에서 영업해?
친절이 뻗혀서 주문도 식탁에 매달려 받더만. 흥.

TGIF 뿐만이 아니다. 그 옆의 스탠다드 챠타드도.
아는 사람이나 알지, 모르는 사람이 알아볼 간판이냐고 그게.
누가 그거 보고 그 간판이 제일은행 간판인 줄 알까.

왜 대리운전기사 아저씨가 영어를 모르는게 멋적어 할 일인지 모르겠다.
영어야, 영어로 벌어먹고 사는 사람들이나 할 줄 알면 되는거지.
영어를 아는 사람들은 모른다. 읽을 줄 모르는 알파벳이 얼마나 당혹스러운지.

0%에 가까운 문맹률을 자랑하는 문자를 쓰는 한국에서,
한글을 쓰는 건 좀 틀려도 읽기는 너무나도 잘 읽는 한국인이 
왜 굳이 다른나라, 다른 문자에 그렇게 쩔쩔매야 하는지 어이가 없었다.
빈티내고 앉아있다는 소리가 절로 나오는 꼬라지.
빈한 티라는게 따로 있는게 아니다.

그 아저씨한테 그렇게 말하고 싶었다.
아저씨, 영어같은거 몰라도 괜찮아요.
쟤네가 이상한거죠.

2007/10/26 00:38 2007/10/26 00:38

여엉-.

from Tous Les Jours 2007/10/23 18:49


 1

 영 만족스럽질 못한 시험들.
 공부를 무진무진 했어도 마찬가지였을것 같은 부분들인데,

 이건 120% 내공의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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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사실 번역 시험을 심하게 망쳐서
           자존심도 좀 상하고
           걱정도 된다.

           기말을 아무리 잘 본들,
           커버하기 힘들 것 같다.           

           한숨



3

어쨌든, 1차 시험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왔더니 주문했던 장난감들이 와 있다.
만화책 같은 소설 한 권, 빠리가 나오는 DVD 한 편, 사진집 한 권.

따뜻한 전기매트에 아픈 어깨를 누이고
오늘 저녁은 이렇게.


 

2007/10/23 18:49 2007/10/23 18:49

꽃!

from Tous Les Jours 2007/10/20 2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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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나, 탐스럽기도 하지! :D


2007/10/20 21:14 2007/10/20 21:14

TGIF!

from Tous Les Jours 2007/10/20 00:45

1

아침에는 모처럼 주룩주룩 비가 왔고, 추웠다.
차분히 수업에 집중할 수 있었으면 좋았을텐데, 자소서 때문에 스트레스성 자괴감에 빠져 똘똘히 듣고 있는 얼굴로 딴 생각을 많이 했다. 공강시간에도, 오후 수업 중에도, 수업 후에도 내내 나를 괴롭힌 자소서. 다행히 마지막 수업이 좀 일찍 끝났고 집으로 돌아와 그냥 솔직하게 마무리 했다. 다만 마지막 온점을 찍는 순간까지도 원서를 쓰느냐 마느냐로 고민했고, 여전히 개운치가 않다.


2

내게는 이인 일조 친구 세트가 있는데, 꼭 둘이서 비슷한 시기에 내게 연락을 해온다.
자소서를 쓰느라 골머리를 앓고 있던 중에 그 중 하나가 전화를 해와 또 편지를 졸랐고,
딱 세시간 쯤 후에 다른 하나가 여행을 마치고 돌아오자마자 잠깐 보자며 전화를 걸었다.
즐거운 마음으로 쫄래쫄래 나갔더니, 귀여운 녀석, 오미야게를 한상자 내민다.
그 녀석 만큼은 아니지만 무진무진 귀여운 히요꼬 세트.
원래도 먹는 선물에 약하지만, 특히 전통과자에는 맥을 못추는 지라 받아들고 감동했다.
학교가서 자랑한답시고 아직 터보지도 않았는데, 사실 누구한테 자랑하나 고민스럽다.


3

히요꼬 덕분에 상큼해진 기분으로 친구를 만나 놀다가, 금요일 밤, 회사와 중간고사에 쩔어 괴로워하는 그녀들을 만났다. 셋이서 모이면 늘 기분이 좋은 우리는 칵테일을 놓고 대단히 시끄럽게 떠들었고, 나는 쿠바리브레 한 잔에 대단히 기분이 좋아져 전신이 빨개졌다. 회사 행사 관계로 좋다고 알려져는 있으나 사실은 지배인이 싸가지 없는 민박집 수준인 S호텔에서  니미럴썅썅바  여자 때문에 심적으로 대단히 고생까지하고 돌아온 뮹언니에게 광고 많고 두껍기로 유명한 럭셔리 10월 호도 얻었다. 덕분에 귀여운 히요꼬 쇼핑백을 찢어먹고 말았지만, 왠지 오늘은 선물 받는 날이라는 생각에 찢어진 쇼핑백을 들고 걷는 것 조차 즐거웠다. 중간고사와 오피스 레이디들의 피로 때문에 더 늦게까지 놀 수 없음을 아쉬워 하며 헤어졌지만, 중간고사가 끝나면 펜션이든 별장이든 빌려 이틀 쯤 놀아제끼자는 제안에 의기투합한 우리는 전부 매우 멀쩡함에도 '나 술먹었소'라 써붙인  얼굴로 각자 집으로 돌아왔다.  


4

내일은 공부하자.
근데
내일은 공부할까?


:D


2007/10/20 00:45 2007/10/20 00:45

아침밥을 먹어요

from Tous Les Jours 2007/10/18 19:50


잠옷차림으로 주방에 앉아 커피를 내리고 있자면
그 완벽한 만족감에 '참 괜찮은 인생이야'라는 말이 절로 나온다.

오늘 아침에도 - 엄마가 알면 싫어할 - 크래커 쪼가리에 크림치즈를 발라 먹으며
커피를 두 대접 마시고 귤을 두개 까먹고 났더니 기분이 구름까지 닿았다.

이게 다 아침밥을 잘 챙겨먹는 습관을 들여준 엄마 덕분이다.





2007/10/18 19:50 2007/10/18 19:50


나란 사람이 참 별로일 때가 있다.

나는나는 자라서 무엇이 될까
늘 고민하고 상상하며 즐거워 했었는데
커피를 많이 마시는 큰 언니가 된 것 말고는
대학교 다니는 초등학교 6학년이나 다름이 없다.

수년에 걸쳐 한쪽 눈과 몸을 망쳐가며
그 넓은 천장과 벽에 하늘색 가득한 그림을 그렸던 그의 열정이
그 탁월한 재능과 교황님 높은 줄 몰랐던 실력보다도 탐이 난다.

다시 한번.



_ L'inspiration de Rome.


2007/10/16 23:38 2007/10/16 23:38

초밥
오카모토 카노코
박영선 옮김


그 허망한 소식을 듣고
삼성역에서 홍대까지 멍하니 지하철을 타면 틀림없이 울어버릴 것 같아서
가던길을 돌아 서점에 들러 한참을 서성였다.

'금방 읽을 수 있을만한, 얇고 쉬운 소설' 을 찾고 싶었는데,
처음 고른 책이 파본이었던 탓에 미야베 미유키의 책이 주욱 꽂혀있는 서가를 멍청하게 서성거리다
누군가 책꽂이 위에 슬쩍 얹어놓고 간 이 책을 발견했다.

단편집. 그것도 딱 네 작품 밖에 들어있지 않은 얇은 단편집이었다.
그 날 기분에 일본 소설은 아니었으면 싶은 마음이었지만,
백년 전 사람이었던 작가의 연보를 읽고 마음이 동해
사들고 서점을 나와 천천히 읽으며 돌아왔다.



참신한 작품집이다.
100년 전을 살았던 여인의 감성이라고는 믿기 어려울 만큼
문학적인 재능과 웃음을 머금게 하는 기지가 네 작품의 이모저모에서 반짝인다.

여성적이고 동양적인 감성에 충실하면서도 서구적인 세련미를 보이는 것이
전형적인 여성 작가의 일본 문학답지만 충분히 매력적이다.  
'재능'의 힘일까.

음식을 소재로 한 세 작품들은 맛깔스럽고
왠지 엄마의 처녀시절을 떠올리게 하는 단편 '뺨때리기'는 고전적이면서도 익살스럽다.

단 두 페이지의 머릿말 만으로 충분히 '좋은 번역가'라는 인상을 주었던 박영선씨의 번역에서도
기존의 인기 일본 소설 번역가들 이상의 '내공'을 느낄 수 있어 만족스러웠다.


2007/10/14 21:18 2007/10/14 21: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