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운 야채를 예쁘게 담아낸 접시.
내가 독차지한 포카치아 바구니
내 앞의 펜네는 제쳐두고 쏙쏙 뺏어먹은 뇨끼.
제일 맛있는 라즈베리 소다
골목길 어정쩡한 테라스에서의 웃음과
그보다 더 좋은 유쾌함
혀끝에서 달콤하게 도는 마티니 아스티
사이다 맛이라고 쭉쭉 마시면
고은혜처럼 (불타는 토마토가) 됩니다.
어쨌든,
술 좀 받는 요즈음.
또 헤실헤실 기분좋아진 술꾼 모드로 귀가.
오백년만에 만난 나의 왼팔과의
즐거웠던, 아쉬웠던 저녁.
지난 목요일, 우리집 마꼬삔(Ma Copine)과 몽꼬빵(Mon Copain)에게 새 친구가 생겼다.
마꼬삔도, 몽꼬빵도 우리집에 올때 이미 화분에서 쑥쑥 자라있는 상태였는데
이번에 들어온 아이는 우연히 스타벅스에 커피를 마시러 갔다가 일회용 잔 대신 머그를 이용하고
씨앗으로 받아왔다. 무려 '우리 꽃 키우기 시리즈'.
2년 전에 그 열악한 기숙사에 살면서도 스타벅스에서 나누어준 왕콩키우기를 성공적으로 해냈기 때문에
별 걱정은 하지 않았지만 어떤 녀석이 나올까, 화분에 커피 배양토를 부으며 참 궁금해 했다.
더군다나 우리집의 두 꼬빵 꼬삔은 꽃을 보려고 키우는 녀석들이 아니라 새록새록 새잎이 나는 재미에 키웠지만,
(사실 몽꼬빵은 나보다 추위에 약한 줄도 모르고 창가에 뒀다가 죽일 뻔도 했다.)
이번엔 꽃을 피우는 화분이라 더 설렜다.
이름을 뭘로 할까 막 고민하다가, - 이미 마꼬삔과 몽꼬빵으로 copains 시리즈는 끝났기 때문에 -
꽃이니까 쫌 사랑스러운 이름으로 하자, 마음을 먹고 Chinese Pink (차이니즈 핑크; 패랭이꽃)라는 이름을 살려
핑키라고 부르기로 했다. 핑키 핑키.
학교는 일단 졸업했지만,
그리고 이제 더이상 '교양 수업'을 들을 일도 없겠지만,
공부는 계속한다.
세상에서 가장 싸고, 편하고, 만만한 선생님이 있다면 그건 책 일거다.
이번 달, 유익했던 두 권.
1
촘스키, 누가 무엇으로 세상을 지배하는가
-드니 로베르, 베로니카 자라쇼비치의 촘스키 인터뷰.
노엄 촘스키에 대해 관심을 가지기 시작 한 건 그리 오래 된 일이 아니다.
언어학 수업을 들으며 처음 그의 생성문법이론을 접했고
그때만 해도, 참 이 양반, 모르긴 몰라도 머리는 엄청 좋은 것 같은데
어쩌다가 이런 공부에 빠지게 된 걸까 하는 참으로 어처구니 없는 생각을 했을 뿐이다.
그래서 정말 아무 생각 없이 이 책을 주문했을때도
촘스키가 언어학과 인문학을 뛰어넘어, 시대의 아이콘인 이유를 전혀 알지 못했다.
솔직히, 이 책이 촘스키에 관한 책 가운데 가장 쉽게 읽을 수 있는 한 권이 아닌가 싶다.
무엇보다도 촘스키와의 밀도있는 인터뷰를 묶어 냈기 때문에
잡지 기사처럼 그의 생각을 읽을 수 있다는 점이 내게는 무척 편안했다.
게다가 필요한 배경지식도 그리 많지 않고, 잘 모르는 사건에는 주석이 달려있어
시사, 세계 정세, 사건에 대해 일자무식이라도 부담없이 읽을 수 있었다.
개인적으로, 인터뷰의 인터뷰어가 두 프랑스 언론인이라는 점이
이 한 권의 책을 통해 내가 얻을 수 있었던 핵심을 제공하는 역할을 했다.
촘스키를 상대적으로 매우 늦게 받아들인 프랑스에서 온 언론인들이었기에
프랑스와, 그런 프랑스를 바라보는 촘스키의 견해를 곳곳에서 읽을 수 있었다.
그러한 대목대목에서, 나는 은연중에 '미국'의 대안으로 '프랑스'를 바라보고 있었던
나의 견해 역시 상당히 편파적이었다는 사실을 깨닫지 않을 수 없었다.
한때 막연히 미국을 상당히 긍정적인 국가적 모델로 삼았던 적이 있었고
그 시기를 벗어나 그 모델을 프랑스와 몇몇 유럽 국가들로 옮겨 두었다.
그러나 자유와 연대와 관용을 부르짖는 프랑스의 지식사회와 그들이 이끄는 프랑스라는 나라가
얼마나 폐쇄적이고 보수적이고 맹목적인지를 제대로 알 필요가 있었다.
적어도 나나, 나와 비슷한 '프랑스를 안다'고 말하는 이들은 정확하게 파악해두었다가
이 사회가 우리의 견해를 필요로 할 때 적어도 헛소리는 하지 말아야 한다.
프랑스는, 아니 유럽은 많은 참고자료를 안고 있을뿐, 결코 온전한 대안이 되어줄 수 없다.
그리고 이제는 말하기도 진부하지만,
제발 미국과, 대기업 좀 그만 좋아하자.
2
리바이어던
- 홉스 / 김용환
내가 이 책을 읽을 줄은 아무도 몰랐을거다.
나도 몰랐다.
영문학사 시간이었나, 거의 매시간 해당 텍스트를 읽고 쪽글을 내야 했는데
그 텍스트들 가운데 하나가 홉스의 리바이어던이었다.
나는 텍스트를 요만큼도 이해하려고 하지 않았고,
책을 사놓고도 스스로 이 책은 못 읽겠거니 하고 책장에 고이 꽂아두었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흘러 작년 여름에 '사놓고 안 읽은 책 읽기 하트 프로젝트'를 시작하며
이 책도 고민고민 끝에 책장에 꽂아 넣었다.
다짐 같은건 하지 않았다. 그저 마음이 무거웠을 뿐.
그런데 그 책장에서 이 책의 순서가 돌아와 뽑아 들었고,
읽기 시작하니 읽히더라는 것이다.
물론 책 자체가 리바이어던의 완역본이 아니라
-완역본은 절판상태라고 한다. 이 대목에서 우리나라 공부한다는 인간들을 한번 비꼬고 싶어진다. 훗-
홉스 전공 교수가 쓴, 정확히 말해 원문의 일부를 포함해 '리바이어던'에 관해 가르쳐주는 책이었기 때문에
완역본을 구들구들 끼고 읽는 것보다 훨씬 쉬웠던 탓이다.
리바이어던은 성경에 등장하는 거대한 괴물의 이름인데,
이는 국가의 막강한 힘을 상징한다.
개인이 최소한- 예를 들면 목숨이 위험할 시의 정당방어 - 을 제외한 권리를 국가에 일임하고
개인들이 모여 국가를 형성하기에 국가 이상의 권력은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이 리바이어던의 토대이다.
국가에 관한 홉스의 견해는 그 자체로 완벽해서라기 보다는 '사상의 가치'를 보여주었기에 빛났다.
2000년대의 대학민국을 사는 내게 이 책이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바로 그리스도 왕국론이었는데,
그 부분을 읽으며 성경을 부여잡고 부흥을 부르짖는 뭇 기독교인들에게
내가 울며 매달려서라도 좀 읽히고 싶은 심정이었다.
홉스의 견해 자체가 훌륭해서가 아니라,
제발 당신들이 사랑하는 하나님에 대해 수백년전에 살았던 이 사람의 열에 하나 만큼이라도
머리를 써서 생각을 좀 해 보라는 말을 하고 싶어서다.
현재 우리나라의 기독교를 보며 여태까지 가장 답답해했던 것이,
어떤 문제가 발생해 그들의 의견을 들어야 했을때 한결같이 보여온 감정적인 태도와
무조건 '믿으면 바뀐다'라는 식의 결론이었다.
종교를 탓하자는 것이 아니라,
이성 역시 하나님이 주신 것이라면
그 이성을 통해 하나님을 좀 알아보고, 고민해보고, 그분을 진지하게 사유해보라는 얘기다.
진정 사랑하고, 그에게 생의 마지막을 맡길 것이라면서
초등학생의 연애질만도 못한 사랑을 그들의 신에게 바치는 모습이,
그리고 그런 '어린양'들을 이용해 일요일마다 '전국 노래자랑'만도 못한 '주님의 말씀'을 떠들어대는
수많은 목회자들의 시뻘건 얼굴이 답답하게 느껴지는 것은 비단 나 뿐이었을까.
수많은 기독교 신자들이 살아가는 이나라, 이 사회안에서
정녕 우러러 볼 만한 기독교 문화가 꽃피기는 커녕
매일같이 그와 관련된 사회 문제가 일어나고 많은 사람들의 쓴소리를 듣는 것은
이미 '리바이어던'을 넘어섰을지도 모르는 막강한 힘인 '종교'가
그 어떤 심각한 고민도 없이 그 자리에 주저앉아 땅따먹기만 하고 있는 사이에
교인들의 삶에 어떤 방향도 제시해주지 못하게 되어버렸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홉스는 날카롭더라도 정확하고자 했던 그의 사상때문에
왕당파로부터도, 교회로부터도 따돌림과 비판을 당해야만했다던데,
오늘날의 교회가 얼마나 달라졌을지 셈이라도 좀 해봤으면 싶다.
제발, 화부터 내지 말고 좀 들어줬으면 좋겠다.
새 달이 돌아오기 전에 한 달동안 읽을 책 목록을 정하고
목록에 줄을 그어가며 열심히 읽기 시작한지도 벌써 세 달이 되었다.
네 권, 세 권에 불과했던 지난 1, 2월의 기록에 비해 이번 달엔 꼬박 열권을 채워 기분이 좋다.
그래서 이번엔 책 읽기 포스트를 네 꼭지로 나눠 정리해 볼까 한다.
2월에는 단 한권도 읽지 않았던 소설을 이번 달에는 한풀이라도 하듯 읽어댔다.
사실 읽은 책의 권 수가 늘어난것도 주 특기인 소설 읽기로 돌아왔기 때문이다.
스무살이 넘고서 만화책을 대신해 즐겨 읽어온 것이 대중 소설들이다.
그것도 책이라고 읽고 있느냐는 뭇 '문학하는' 사람들의 무시에도 나는 이런 소설들을 사랑한다.
재미있고, 일상에 가깝고, 편안하다.
책으로 스트레스를 푸는 내게 이보다 더 좋은 주전부리가 있겠는가.
1
내일의 기억
-오기와라 히로시
예전부터 엄마가 보고싶어했던 영화의 원작 소설이다.
동네 DVD 가게에도 들어오질 않고, 하나 TV에도 올라오지 않아서 DVD를 구하는 중이었는데
가격이 떨어지지 않아 꿍하니 기다리고 있는 중이었다.
그런데 용산역에 가면 늘 들리는 플랫폼 헌책방에서 이 소설을 발견했다.
엄마드리려고 사긴 했지만 내가 먼저 읽고, 바쁜 엄마는 아직도 못 보셨다.
처음엔 살짝 밋밋하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차분한 소설이었다.
하지만 그 차분함 너머에 자잘한 삶의 무늬가 새겨져 있다.
마치 해질녘 호수의 물결처럼 잔잔하고 애달픈 이야기가.
기억을 잃는다는 건, 조각난 내 자신을 한 조각, 한 조각 씩 잃어버리는 느낌이 아닐까.
알츠하이머라는, 현존하고 있는, 그리고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앓고 있는 병에 의해
한 인간의 자잘한 일상이 사그러져 가는 모습을 덤덤하게 바라보는 기분이었다.
흔히 불치병에 걸린 주인공의 이야기는 독자의 눈물샘을 짜내기 위해 무진장 노력하기 마련인데,
이 소설은 그런 구석 없이 시종일관 차분한 이야기를 이어간다.
하지만 그 차분한 페이스로 가차없이 주인공이 무너져내리는 모습을 지켜봐야만 했다.
몇 번이고 도예교실 선생에게 젓가락 받침대의 소성비를 내는 사에키의 모습에 가슴이 아팠고
더 이상 아내를 알아보지 못하는 채로 해질녘 산길을 걸어 내려가는 부부의 모습이
서글프고도 아름다웠다.
2
타인의 섹스를 비웃지 마라
- 야마자키 나오코라
이 책을 읽게 된 건 순전히 이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에 아오이 유우가 출연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에는 언제 들어올지, 기다리고 있는데 도통 기미가 보이질 않아 그냥 책을 먼저 읽었다.
놀라울만큼 얇고, 글씨도 큰 책이었다.
그래서 이 책의 첫 페이지를 읽는 순간에도 이 소설이 불륜 소설인지, 유우가 무슨 역으로 나오는지
가늠도 못하고 있었다.
굉장히 비범한 작가, 비범한 소설이라는 비평은 좀 과하다 싶고,
그냥 킬링 타임 용으로 제격인, 읽고 난 후에도 불쾌하지 않은 불륜 소설이라고 말하고 싶다.
부분부분 작가의 재치가 돋보이는 글줄들도 있었으나
불친절한 나는 '이 정도 감각도 없이 대중 소설 작가를 할 수는 없지' 라며 심드렁하게 넘어갔다.
'나는 유리에게 최선을 다하고 있다'고 자신하는 열 아홉살 남자아이의 적당히 자기 중심적인 사랑법이
신선했다. 보통 불륜 소설을 싫어하는 쪽이고, 불륜 소설에서 연상을 좋아하는 남자아이들이 지나치게
조숙하고 감상적이고 뭔가 고고한 인상을 주는 것이 늘 불만이었던 나로서는, 한 때에 지나지 않는
어린 남자애의 불장난을 그답게 그린 작가의 경쾌함이 마음에 들었다.
3
맨드라미의 빨강, 버드나무의 초록
- 에쿠니 가오리
내가 이 책을 읽지 않을리 없다.
에쿠니 가오리의 오만가지 쓸데없는 책들을 전부 가지고 있는 나는
이번에도 습관성 반, 호기심 반으로 이 책을 주문했다.
요즘 낼 만한 소설이 없는지 자꾸 옛날 에쿠니상의 단편들을 모아서 책으로 내는데
그러느니 차라리 내가 몇년 전부터 읽고 싶어하는 '장미나무 비파나무 영 몽 나무'나 내줬으면 좋겠다.
아니면 '제비꽃 설탕절임.'
일본어만 제대로 읽을 줄 알았으면 진즉 원서를 샀을 소설들이다.
이 책을 읽은 사람이라면 가장 어이없어 하겠지만,
나는 '재앙의 전말'이 가장 마음에 들었다.
고양이가 옮겨온 벼룩때문에 남자친구와 헤어지게까지 되는 여자의 이야기인데,
베드버그나 각종 알 수 없는 벌레의 공포에 시달려 본 사람이라면 너무 공감 되서 눈을 뗄 수 없는 작품이다.
이 작품을 읽으면서 작가와 작품, 독자(나)의 감정이 완벽하게 일치되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면
다들 웃겠지만.
사실 굉장히 좋았던 '쯔메타이요루니(차가운 밤에)'에 비교하면 좀 아쉬운 느낌이었다.
하지만 에쿠니상의 초기작이라는 점을 생각해보면 왠지 80년대, 90년대의 그녀를 만나는 것 같아
새롭기도 하다. 소설의 완성도 보다도, 당시 덜 세련되고 더 신선한 에쿠니 가오리를 만난다는데
이번 단편집의 의의를 둘 수 있겠다.
한 남자에게 빠지는 건 너무 힘들다며 이 남자 저 남자를 오가는 여자의 이야기를 납득시키고,
게이 커플과 알콜 중독자 여자의 이야기를 상상초월의 방향으로 끌고나감에도
또 납득시키는 에쿠니 가오리의 무심하고도 섬세한 솜씨에 감탄했다.
4
곰의 포석
- 호리에 도시유키
언젠가 이책을 분명히 읽고 싶다고 생각했었는데, 그게 언제, 어디였었는지 가물가물하다.
책에 관한 웹서핑 중이었는지, 삼청동 내서재에서 본 책 날개에서 였는지 도통 기억나질 않는다.
아무튼 이 책을 샀고, 읽었다.
세편의 단편 모두 프랑스가 배경이거나, 프랑스와 관련이 있는 주인공이 등장하기도 하거니와,
작가가 프랑스에서 몇년씩 공부한 불문학자 - 게다가 빠트릭 모디아노의 작품을 번역한 번역가 -라서
작품의 작은 부분 하나하나에도 눈길이 갔다.
책의 제목이기도 한 '곰의 포석'을 읽던 중에 이 제목을 설명하는 라 퐁텐의 우화 부분을 읽고
사실 상상해보면 너무나 처참한 이야기임에도 박장대소 하고 말았다.
곰의 포석(le pavé de l'ours)이라는 말은
불어로 도와주겠답시고 한 일이 해가 되는 것을 말하는 표현인데,
라 퐁텐의 '곰과 원예가'라는 우화에서 유래되었다.
옛날, 외진 숲속에 외롭게 살던 곰이 꽃과 나무만을 돌보며 역시 외롭게 살던 원예가와 친구가 되었다.
곰은 사냥을 하고 늙은 원예가는 정원을 가꾸며 사이좋게 함께 살았는데,
곰은 노인이 낮잠을 자는 동안 파리를 쫓아주는 일도 했다.
어느날 성가신 파리 한마리가 노인의 코에 앉았고, 아무리 발을 휘저어도 쫓을 수가 없었다.
이 충실한 파리쫓이 곰은 파리 쫓기에 열중한 나머지 포석을 하나 집어들어 내던져 파리와 함께
노인의 머리를 박살내 버렸다.
계속해서 라 퐁텐의 우화는 이렇게 마무리 된다
이리하여 추론에는 서툴지만 뛰어난 투수였던 곰은
그자리에서 노인을 즉사시켰다.
무지몽매한 친구만큼 위험한 것은 없다.
현명한 적이 오히려 훨씬 낫다.
멍청한 친구의 위험성을 나타내기 위해 이런 이야기를 생각해낸 라 퐁텐의 상상력이 기가막힐 따름이다.
그리고 그걸 숙어로 만들어 쓰고 있는 프랑스 사람들의 언어관도.
이어 '모래장수가 지나간다'라는 단편도 꽤 분위기가 좋았다.
모래장수가 지나간다(Le marchand de sable est passé)는 불어로 졸리다는 뜻의 숙어인데
솔직히 이것도 한국인의 정서로는 이해하기 쉽지 않지만
이 단편을 보면 왠지 그런 느낌이 들어 졸린다.
아쿠타가와 상 수상작 치고 여태 재미있는 작품을 못봤는데
이 작품은 나의 관심사에 부합해서였기 때문인지 상당히 재미있게 읽었다.
무엇보다도,
우리학교에 이렇게 젊고, 작품 활동을 하는 현직 작가에, 부지런히 번역도 하는 교수님이 계셨더라면
내가 학교를 6년은 다니지 않았을까 싶은 아쉬움이 마구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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